[무대 뒤 몸 이야기]<10>발레리나의 등은 말을 한다

  • 입력 2005년 9월 24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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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백조의 슬픔을 팔과 더불어 미세하게 움직이는 등 근육으로 표현한 ‘빈사의 백조’.동아일보 자료 사진
죽어가는 백조의 슬픔을 팔과 더불어 미세하게 움직이는 등 근육으로 표현한 ‘빈사의 백조’.동아일보 자료 사진
등에도 표정이 있다.

특히 발레리나에게 등은 다리 못지않게 중요한 신체 부위다. 미국의 스타 발레리나 신시아 그레고리가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것은 러시아 발레리나의 등”이라고 토로한 적도 있을 만큼. 흔히 ‘테크닉은 발에서 나오지만 표현은 상체에서 나온다’고들 한다. 발레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화려한 테크닉만이 아닌 감정을 담아내는 표현력이 중요한데 등은 이와 직결된다.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장은 “발레의 표현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가슴인데, 등을 잘 사용하면 가슴이 열리고, 가슴이 열려야 표현력이 풍부해진다”며 “등의 자세에 따라 목부터 어깨, 팔 다리에 이르는 선이 좌우되므로 등을 단련시키는 훈련은 무용수에게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발레리나들이 꼽는 아름다운 등은 작고 섬세한 근육들이 가득 찬, 풍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등이다. 등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은 ‘백조의 호수’와 ‘지젤’. ‘백조의 호수’의 경우 백조 군무를 추는 발레리나의 등이 조명을 받으면 섬세한 근육선들이 드러나면서 백조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마치 등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 꿈틀댄다. 이런 모습을 관객에게 좀 더 잘 보여주기 위해 다른 작품에 비해 의상의 등 부분도 더 깊게 파여 있다.

등 때문에 남모르는 애로사항도 겪는다.

“발레리나들은 바닷가나 수영장에 잘 가지 않는다. 나도 올여름 한 번도 수영장에 가지 않았다. 햇볕에 타서 자칫 등에 수영복 끈 자국이 남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발레리나 강미선)

건강한 구릿빛으로 그을린 가냘픈 백조를 상상하기 어려운 만큼 ‘백조의 호수’ 공연을 앞둔 무용수들에게 선탠은 금물. 피부가 까무잡잡한 무용수는 뽀얗게 보이기 위해 등에 분을 바르기도 한다.

‘백조의 호수’는 앙상블의 등이 가장 고통 받는 작품이기도 하다. 무심히 서 있는 듯한 백조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정작 무용수들은 등의 근육을 엄청나게 긴장시킨 채 서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공연을 끝내고 나면 등에 담이 들거나 등이 아파 고생하는 무용수들도 적지 않다.

뒷모습만큼 정직한 게 있을까? 발레리나의 등은 고통을 인내하며 흘린 땀과 노력의 결과다. 관객들은 무심코 보아 넘기지만, 등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쩌면 뒷모습은 그 빈약함 때문에 오히려 효과적이고, 간결해서 오히려 웅변적이다. 등이 말을 한다. 반만, 사분의 일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미셸 투르니에의 ‘뒷모습’ 중에서)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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