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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기억하라, 현대사의 비극이 낳은 ‘괴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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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기억하라, 현대사의 비극이 낳은 ‘괴물’을

조종엽기자 입력 2017-03-18 03:00수정 2017-03-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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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기, 괴물/임철우 지음/382쪽·1만3000원/문학과지성사
3년 만에 새 소설집 ‘연대기, 괴물’을 낸 소설가 임철우 씨. 그는 소설을 통해 연속된 수난의 현대사를 주인공들의 연대기로 복원해 나가면서, 고비마다 들끓었던 폭력을 포착해낸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205호에선 칠십 노모가 마흔이 넘은 아들의 발을 씻겨주고 있다. 교통사고로 척추를 상한 아들은 … 맞은편 206호에선 혼자 사는 주정뱅이 영감이 … 204호 양 씨 방 현관문이 빠끔 열려 있다. 정확히 3년 후 이 남자는 입안에 약을 한 줌 털어 넣고 … 202호 여자는 마침 혼자서 팔뚝에 인슐린 주사를 놓고 있는 참이다.”(‘세상의 모든 저녁’에서)

프랑스 파리 시몽크뤼벨리에 거리의 한 아파트에는 거주자들뿐 아니라 사물들까지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인생 사용법’·조르주 페렉) 한국 쪽방촌 노인들은 어떨까. ‘살아온 얘기를 쓰면 대하소설이 나온다’지만 진짜 소설이 나왔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5·18민주화운동 소재의 명작 ‘봄날’(1997년)의 작자가 3년 만에 낸 이 소설집은 쪽방촌 노인들처럼 스스로는 말할 수 없는, 억눌린 이들의 이야기다.

이전 소설집 ‘황천기담’(2014년)에서 설화적 상상력을 선보였던 저자는 다시금 비극적 현대사에서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이들에 주목한다.

아들이 외환위기 뒤 파산과 이혼 끝에 어이없는 죽음을 맞은 아버지는 아내마저 먼저 떠나보내고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흔적’) 6·25전쟁이 끝날 무렵 ‘산사람’들을 따라 올라간 형이 지리산 골짜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자 아버지는 일손을 놓아버린다.(‘세상의 모든 저녁’) 1950년 초가을 새신랑이던 초임 순경은 인민군과 함께 이웃 섬에서 건너온 ‘몽둥이패’에게 맞아죽었다.(‘이야기집’) 아내의 아버지는 오래전 새벽에 논에 나가다 집 앞 도로에서 뺑소니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간이역’)

구순 잔치 대신 60년 전 바다에 빠져 죽은 두 아들의 넋을 건지는 굿을 한 소설 속 노파처럼, 작가도 소설로 억울한 망자들의 넋을 건진다.

“저 평범한 골짜기, 숲, 해변, 모래밭, 웅덩이, 개울, 고목나무, 우물 하나에도 저마다의 이름과 이야기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이야기집’) 금간 술병 하나도 그저 허섭스레기가 아니다.(‘세상의 모든 저녁’) 고독사로 시신이 부패해 가는 왕년의 떠돌이 옹기쟁이가 과거 ‘지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을 생각하며 바닥에 작은 새를 그려 넣었던 술병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굴곡과 요철로만 이어진 비포장길, 그나마도 출구 없는 막다른 길”의 인생을 산 이들에 대한 애정이 소설 전반에 배어 있다.

표제작은 구원이 없는 이야기다. 한 노숙인의 투신자살 기사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몽둥이패’(서북청년단) 두목에게 겁탈당한 어머니로부터 태어났다. “몽둥이패에 끌려가 수중고혼이 된 그 젊은 사내가 … 어째선지 아이는 얼굴조차 본 적 없는 그 새신랑이 자신의 진짜 아비였더라면, 하고 내심 바란 적이 많았다.” 베트남전에서 정신적 외상과 함께 고엽제 피해를 입은 그는 세월호 참사 뉴스를 본 뒤 ‘괴물’을 목격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철커덩 철커덩, 또는 쿵쾅쿵쾅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이미 죽은 아내(흔적) 또는 곧 죽을 아내(‘간이역’)와 함께 있다. 현실에서는 열차가 목적지에 닿을 것이지만 소설은 그 순간에 멈춘다. “다음 세상에선 … 나무로, 풀 한 포기로, 꽃 하나로 그렇게 피어났다 사라지고 싶소.”(‘흔적’) 소설의 구원이란 그런 것이겠다. 작가의 완숙한 필력은 소설을 넘어 ‘잊지 않을게’라는 말의 윤리를 되새기게 만든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연대기 괴물#임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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