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은밀하고 위대한’ 女작가들의 작업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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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여자의 공간/타니아 슐리 지음·남기철 옮김/288쪽·1만4500원·이봄
버지니아 울프·애거사 크리스티 등 여성 작가 35명의 글쓰는 공간 조명

타자기, 펜, 종이만 놓인 책상에서 글을 쓰는 애거사 크리스티. 실용적인 성격으로,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쓰기에 몰두했던 그는 “설거지를 할 때 좋은 구상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이봄 제공
타자기, 펜, 종이만 놓인 책상에서 글을 쓰는 애거사 크리스티. 실용적인 성격으로,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쓰기에 몰두했던 그는 “설거지를 할 때 좋은 구상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이봄 제공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마음 놓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소가 천국이라고.”

이렇게 말한 버지니아 울프는 낙원에서 산 셈이다. 영국 남부 해안에 자리한 집의 정원에 오두막을 짓고 글을 썼으니까. 정원이 보이는 ‘자기만의 방’ 외에도 침실, 거실 등을 원고로 어지럽히며 작품에 몰두했다.

저자는 사진, 일기, 인터뷰와 지인의 진술을 바탕으로 여성 작가 35명의 작업 공간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여성의 방과 가방을 보는 건 내밀한 속내를 살피는 것과 비슷하기에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해나 아렌트, 시몬 드 보부아르, 수전 손태그, 애거사 크리스티, 이사벨 아옌데…. 이름만으로도 일단 책장을 넘기게 된다. 저자는 작가들의 작품은 언급하지 않겠다고 선을 긋는다. 삶이 고스란히 담긴 공간은 그들의 인생사와 자연스레 버무려지고 작품이 태어난 과정도 살짝살짝 엿볼 수 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보부아르는 상류층의 의무였던 파티가 죽음처럼 지루했기에 호텔과 카페에서 글을 썼다. 장편소설 ‘레 망다랭’으로 공쿠르상을 받은 후에야 상금으로 집을 마련한다. 서가에 수북이 쌓인 책 더미 앞자리는 계약 결혼한 연인 사르트르의 사진들이 차지하고 있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부엌 식탁도 마다하지 않고 어디서나 글쓰기에 몰두했다. “튼튼한 책상과 타자기 외에는 필요한 게 없어요”라며. 출판사에서 받은 돈으로 온실을 만드는 등 생활에 요긴하게 썼던 그에게 글쓰기는 거대한 사명이 아닌 직업이었다. 소설에 살인 도구로 독약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1차 세계대전 때 군 병원에서, 이후에는 약국에서 일한 경험이 바탕이 됐다.

‘삐삐 롱스타킹’은 침대에서 태어났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앓아누운 딸을 위해 붉은색 머리를 땋은 당찬 소녀의 이야기를 지어 들려줬다. 자신이 다리를 다쳐 병상에 눕자 비로소 책을 쓰기 시작했고, 침대에서의 글쓰기는 습관으로 굳어졌다. ‘닐스의 신기한 여행’으로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셀마 라겔뢰프가 향토적이고 소박한 작품을 탄생시킨 데는 사랑했던 스웨덴 시골 고향집의 2층 서재도 한몫했다. 다리 길이가 달라 흔들리는 부엌 식탁은 이사벨 아옌데가 몽환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작품을 토해 내게 만들었을지 모른다고 저자는 추측한다.

1930, 40년대 ‘책에 흥미를 잃게 만든다’는 이유로 잘 싣지 않았던 여성 작가들의 얼굴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렌트, 손태그, 프랑수아즈 사강, 마르그리트 뒤라스, 보부아르 등의 손가락 사이에는 한결같이 불붙은 담배가 끼워져 있다.

강의하던 연단에서 내려온 작가와 따로 만나 차 한잔을 기울이는 기분이다. 화보집에 가까울 정도로 풍부한 사진이 돋보이지만 작가의 삶을 글로 넉넉히 담아냈다면 책이 좀 더 단단해질 것 같다. 비슷한 결을 지닌 책으로는 ‘작가의 책’(문학동네) ‘작가의 창’(마음산책)이 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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