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독립선언,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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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년 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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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在日유학생들 1921년 2차 독립선언…매년 3·1기념시위 등 끈질긴 투쟁

1921년 11월 워싱턴 군축회의를 앞두고 도쿄 유학생들이 제2차 독립선언을 했음을 전하는 동아일보 1922년 1월 18일 기사. ‘동경유학생 선언서사건 공판’이라는 큰 제목과 ‘망국청년의 번민은 검사도 동정’ ‘독립희망은 당연, 변호사의 무죄 주장’ 등의 작은 제목을 달았다. 동아일보DB
1921년 11월 워싱턴 군축회의를 앞두고 도쿄 유학생들이 제2차 독립선언을 했음을 전하는 동아일보 1922년 1월 18일 기사. ‘동경유학생 선언서사건 공판’이라는 큰 제목과 ‘망국청년의 번민은 검사도 동정’ ‘독립희망은 당연, 변호사의 무죄 주장’ 등의 작은 제목을 달았다. 동아일보DB
“금번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를 기회 삼아 조선 독립의 필요와 우리의 요구가 간절하다는 의사를 표시할 계획으로 결의문과 선언서를 썼다. … 이는 조선 민족뿐 아니라 동양평화와 세계평화, 정의 인도를 위하여 극히 긴절(緊切)한 일로 생각한다.”(동아일보 1922년 1월 18일자 3면 머리기사)

1922년 1월 12일 일본 도쿄지방재판소 형사 제2호 법정.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재일 한인 유학생들은 법정에서도 당당했다. 1919년 2·8독립선언에 이어 1921년 11월 5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차 독립선언을 거행한 이들이었다.

동아일보는 당시 방청석이 한인 유학생과 신문기자가 어깨를 부비고 들어서서 긴장한 기운이 넘쳤다고 보도했다. 중형을 구형한 검사도 논고에서 “우선 망국청년으로 그에 대한 번민을 가진다는 것은 동정하는 바이며…”라고 해 일순 설득당하는 듯했다. 2차 독립선언서를 만들고 배포한 주역인 이동제 김송은 전민철 이정윤 등은 금고 9개월을 선고받았다.

1919년 도쿄에서 조국 독립을 외쳤던 2·8독립선언. 8일 100주년을 맞는 이 선언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재일 한인 유학생들은 1921년 11월 ‘2차 독립선언’과 3·1운동 기념집회 등을 통해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나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동아일보는 이를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김인덕 청암대 교수는 “도쿄 유학생을 비롯한 재일 조선인들은 광복을 맞을 때까지 거의 해마다 3·1독립선언 기념 시위와 집회를 벌였다”고 말했다.

동아일보가 후원한 학우회 주최 일본 유학생 순회강연을 듣기 위해 1920년 7월 18일 서울 단성사 앞에 몰린 사람들. 동아일보DB
동아일보가 후원한 학우회 주최 일본 유학생 순회강연을 듣기 위해 1920년 7월 18일 서울 단성사 앞에 몰린 사람들. 동아일보DB

▼ 청년들이 싹틔운 일본내 항일투쟁, 광복의 날까지 이어가 ▼
在日유학생들 끈질긴 투쟁


1919년 2·8독립선언에 비해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1921년 2차 독립선언은 오늘날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동아일보가 1922년 1월 3차례에 걸쳐 전한 공판 소식에서 그 전모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작년 11월 5일에 동경신전구서소천정(東京神田區西小川町)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학우회 석상에서 제2회 조선독립선언을 결의하고 인쇄물을 배포한 일로 동경감옥의 쓸쓸한 철창에서 과세(過歲)를 하게 되었던….”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2차 독립선언의 주역들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일문과 영문으로 번역해 각 대사관과 공사관, 신문사에 배포했다. 그뿐 아니라 유학생 독립운동 동지 방원성을 중국 상하이로 보내, 임시정부와 연계해 독립선언을 워싱턴 회의에 제출하려 했다. 조선청년독립단 공동대표 자격으로 임정에 도착한 방원성은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촉구하고 1923년 이 회의에서 교육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김인덕 청암대 교수는 “이들의 선언서는 ‘조선의 독립이 곧 극동, 세계평화의 원동력’임을 확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일 한인들의 독립 투쟁은 학우회를 중심으로 지속됐다. 김 교수에 따르면 재일 유학생들은 1920년 2·8독립선언 1주년 기념축하문을 작성해 임정과 국내로 보내려 시도했다. 3·1운동 1주년을 맞은 그해 3월 1일에는 다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였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군중 70여 명은 도쿄 히비야(日比谷·일비곡)공원에 모여 ‘대한국 만세’를 높이 외쳤다.

집회는 1921년에도 이어졌다. 본보는 “조선유학생 약 100명은 일비곡 공원에 집합하여 독립선언의 연설을 하였음으로 경관대는…76명의 학생을 검거하였는데 계속 검거 중이라더라”(1921년 3월 3일자)고 전했다.

1924년 2월 28일 ‘3·1운동 기념식’이라는 연설회에는 학우회와 조선노동동맹회, 북성회 등의 주최로 120명이 참가했다. 1926년 학우회 주최 기념식에는 250명이 참석했고 도쿄 시내와 공원에서 시위를 벌였다. 1927년 이후에는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가 3·1 기념 시위와 투쟁을 이어갔다. 김 교수는 “일본 정부는 특히 조선인 유학생을 ‘민족해방운동의 저수지’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은 “2·8독립운동은 3·1운동의 기폭제로 조명돼 왔지만 사상적 배경이나 운동의 성숙도 면에서 볼 때 청년들은 새로운 시대의 싹을 틔운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동아일보도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유학생들의 국내 활동을 전폭 지원했다. 학우회가 1920년 7월 연 전국 순회강연회를 후원하기도 했다. 이 강연회에는 2·8독립선언으로 옥고를 치른 김도연 윤창석 이종근 등 유학생 18명이 연사로 참가했다. 동아일보는 2·8선언의 ‘설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주간 장덕수를 부산에 보냈고, 강연단 활동을 일일이 취재해 보도했다. 연사들이 전국 약 10곳을 거친 뒤 서울 단성사에서 18일 연 강연회에는 3000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이날 강연회는 시작 1시간 반이 지나 김도연이 ‘조선 산업의 장래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연설하던 중 일본 경찰이 돌연 중지와 해산을 명령했다. 보안법 제2조 “불온의 언사를 용(用)하여 치안을 문란함이 파다”했다는 이유였다. 이를 빌미로 19일 이후 강연은 모두 중지되고 강연단은 강제 해산됐다.

동아일보는 7월 22일 1면 사설로 “무차별이니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니 선정덕정(善政德政)이니 하는 사(蛇·뱀)의 설(舌·혀)을 농(弄)하야 조선인을 기만치 말라”고 조선총독부를 맹렬히 비판했다. 이 날짜 신문은 총독부에 의해 발매금지처분을 당했다.

한편 8일 일본 도쿄 시내 재일본한국 YMCA 건물에서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다. 재일본한국 YMCA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하는 이 행사에서는 회관 건물 10층 협소한 곳에 자리했던 2·8독립선언기념관을 2층으로 확장 이전하는 기념식과 함께 선언의 의미를 짚어보는 한일 전문가들의 학술대회도 열린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안영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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