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환 기자의 억지로 쓰는 문화수다]폴리는 어지르고, 엠버는 왜 치우기만 할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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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 만화 속 왜곡된 성역할

국내외에서 인기가 높은 유아용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 ‘꼬마버스 타요’ ‘로보카 폴리’ ‘코코몽’(위로부터). 얼핏 봐도 여성 캐릭터가 남성보다 수가 훨씬 적다. EBS 제공·동아일보DB
국내외에서 인기가 높은 유아용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 ‘꼬마버스 타요’ ‘로보카 폴리’ ‘코코몽’(위로부터). 얼핏 봐도 여성 캐릭터가 남성보다 수가 훨씬 적다. EBS 제공·동아일보DB
정양환 기자
정양환 기자
더워도 너무 덥다. 어디 나가기조차 버겁다. 아빠 엄마가 허덕이니 다섯 살 사내아이는 심심하다 난리. 지난 휴일, 아이스크림 하나 쥐여 주곤 TV를 켰다. 마침 좋아라 하는 만화영화 ‘출동! 슈퍼 윙스’ 시간. 겨우 숨 좀 돌렸다.

허나 아이는 가만히 보질 않는다. 이것저것 조잘댄다. 쟤는 누구고, 저 친구는 어떻고. 근데 한마디가 귀에 콕 박혔다.

“아빠, 아리는 여자라서 저렇게 인사하는 거야.”

슈퍼 윙스는 택배 비행기들이 주인공. 아리는 헬리콥터인 여성 캐릭터다. 온몸이 핑크라 얼핏 봐도 안다. 아리 인사는 확실히 달랐다. 걸그룹 안무처럼 다리 꼬고 윙크한다. 나머진 쩍 벌리고 경례하는데.

유아 애니메이션에서 왜 이렇게까지. 이런 불편함이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최근 인터넷 청원사이트 ‘아바즈’엔 EBS를 상대로 “애니메이션의 성(性) 차별적 내용을 줄이자”란 주장이 올라왔다. 현재 1000명 넘게 서명하며 적지 않은 이가 공감했다.

내용은 이렇다. 서울 한 초등학교 교사가 학생들과 TV 만화를 봤더니, 양성평등에 어긋나는 대목이 많았단다. 먼저 ‘뽀롱뽀롱 뽀로로’ ‘꼬마버스 타요’ ‘로보카 폴리’ 등의 평균 남녀 성비는 3 대 1. 행정자치부의 7월 기준 남녀 인구수가 각각 약 2580만 명으로 1 대 1(심지어 여성이 2만9234명 많다)인 현실과 동떨어진다. 복장이나 성격도 고루하다. 여아 캐릭터는 주로 핑크 계열로 치마와 머리핀을 착용한다. 뽀로로나 타요는 ‘씩씩’ ‘명랑’한데, 루피 엠버는 ‘상냥’하다.

‘뭐, 이게 대수냐’고 할 수 있다. 그럼 에피소드를 들여다보자. ‘로보카 폴리’ 시즌1 15회엔 청소를 도맡아 힘겨운 엠버가 나온다. 폴리와 로이는 마을 순찰을 간다며 훈련장 정리를 당연한 듯 부탁한다. “왜 나만 치우나”며 속상한 엠버. 친구들이 달래는 말도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 ‘똑같이’ 하자가 아니고. 정리는 여전히 엠버 몫이다.

‘꼬마버스 타요’는 어떤가. ‘공주님이 되고 싶어요’에서 라니는 예쁜 드레스를 부러워하며 공주를 꿈꾼다. ‘하나누나의 외출’에선 타요 로기는 뛰어노는데, 라니는 TV만 본다. ‘뽀롱뽀롱 뽀로로’ 시즌2 10회는? 루피는 예쁜 머리핀을 칭찬받고 싶은데 다들 몰라봐 속상하다. 끝내 알아본 건 같은 여성 캐릭터 패티였다.

EBS 측 설명을 들어보자. “전체를 봐주면 좋겠어요.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올바른 의식을 담은 애니메이션도 꽤 있습니다. 요즘엔 제작 때부터 남녀 구분하지 않고 ‘또래 어린이’라 불러요. 앞으로도 고착화된 성역할을 전달하지 않도록 유념하겠습니다.”

어쩌면 이건 좋은 징조일지 모른다. 예전 만화는 더 심각했으니. 황중환 조선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도 “결국 어린이 만화도 그 사회의 인식 수준을 반영하는데 과거엔 이런 문제 제기조차 드물었다”며 “이런 논의가 애니메이션을 더 건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부모는 걱정이다. 한 심리학자는 “어릴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왜곡된 인식을 지니는 ‘고정관념의 위협(Stereotype threat)’에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앞으로도 만화는 볼 텐데. 그때마다 눈에 쌍심지 켜고 지켜야 하나. 에고, 오늘 저녁엔 아이에게 핑크가 얼마나 근사한 색깔인지 일러줘야겠다. 나부터 한걸음씩.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뽀로로#꼬마버스 타요#로보카 폴리#왜곡된 성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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