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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東亞]<14> TV 나오기前 속보 전해준 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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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東亞]<14> TV 나오기前 속보 전해준 호외

조종엽기자 입력 2018-01-03 03:00수정 2018-01-03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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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나석주 의거’ 호외 발행… 일제가 압수하자 다음날 또 호외
6·25발발 이틀뒤 포탄속 뿌려… 이승만 정권 때는 민주주의 이끌어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을 전한 동아일보 호외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승하 소식을 전한 호외 김일성 사망 호외 월드컵 한미전 소식이 담긴 호외를 읽는 붉은악마 응원단. 동아일보DB
‘호외(號外)요!’

1923년 3월 15일 동아일보 판매원이 달랑거리는 방울을 허리춤에 차고 일제강점기 서울의 거리를 뛰며 외친다. “총을 맞아 숨이 진한 후에도 육혈포에 건 손가락을 쥐고 펴지 아니하고 숨이 넘어가면서도 손가락으로는 쏘는 시늉을 하였다.” 손에 들린 호외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의사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두 달 전 벌어진 일이지만 일제 당국이 보도를 금지해 알리지 못하다가 해제 즉시 호외를 낸 것.

동아일보가 26일 지령 3만 호를 발행하지만 ‘호외’가 있기 때문에 실제 발행한 신문은 그보다 많다. 호외는 중요한 뉴스를 빨리 전하기 위해 임시로 발행하는 신문으로, 지령을 세는 호(號)에는 포함되지 않는다(外). 호외는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을 전한 뉴스 속의 뉴스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 소식을 담은 호외를 압수하는 당국과 동아일보가 힘겨루기를 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나석주 의사의 폭탄 의거 보도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1927년 1월 13일 바로 호외를 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허락받지 않은 내용이 담겼다며 호외를 압수했다. 동아일보는 다음 날 또 ‘호외의 호외’를 발행하면서 “경무국이 기사 내용을 딕테이트(dictate)한다는 것은 경찰 만능의 조선에서도 초유의 사(事)엿다. 아모리 주책없는 경무당국이라도…”라며 날 선 비판을 가했다.

첫 호외는 창간 보름 만인 1920년 4월 15일 평양에서 벌어진 만세운동 기사로 신문이 발매 금지 처분을 당하자 다시 낸 것인데 남아 있지 않다. 순종 승하를 전한 호외(1926년 4월 27일),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소식을 알린 두 차례의 호외(1936년 8월 10일) 등 민족의 아픔과 기쁨이 호외로 전파됐다.

광복 이후에도 호외가 주요한 속보 매체였다. 6·25전쟁 발발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 오후에도 동아일보는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라는 호외를 찍었다. 피란으로 배포할 사람이 없어 시경에서 빌린 지프차를 타고 기자들이 시청 앞, 광화문, 중앙청, 안국동을 돌며 포탄이 산발적으로 시내에까지 날아드는 가운데 호외를 뿌렸다.

동아일보의 호외는 민주주의의 전진을 이끈 신호탄이었다. 1960년 3·15부정선거가 일어나자 불법·무효를 알리고, 4월 11일 마산에서 시위에 참가했다가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된 일을 알린 것도 호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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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에는 TV와 인터넷의 발달로 이전에 비해 호외를 내는 일이 확 줄었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1994년 7월 9일) △‘성수대교 붕괴’(1994년 10월 21일)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1995년 4월 28일) △‘삼풍백화점 붕괴 속보’(1995년 7월 3일) △‘KAL기 괌서 추락’(1997년 8월 6일) 등 굵직한 뉴스가 호외로 다뤄졌다. 21세기에도 호외는 월드컵 승전보나 김정일 사망,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전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27년#나석주#의거#호외#동아일보#이승만#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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