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인사이트]경사노위 대타협 ‘기구독립-정책연속-창구단일화’에 달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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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대화 성공을 위한 3원칙
[1] 독립성 지켜야 강력한 힘 가져
[2] 정부 바뀌어도 정책은 지속돼야
[3] 경사노위로 대화창구 단일화해야

탄력근로제 확대 논의가 한창이던 올해 2월 19일 서울 종로구 S타워 7층에 있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대회의실이 어둠에 잠겨 있다. 지난해 11월 ‘한국형 사회적 대화기구‘를 표방하며 출범한 경사노위는 출범 5개월 만에 태생적 한계를 노출했고 사회적 대화는 표류하고 있다. 동아일보DB
탄력근로제 확대 논의가 한창이던 올해 2월 19일 서울 종로구 S타워 7층에 있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대회의실이 어둠에 잠겨 있다. 지난해 11월 ‘한국형 사회적 대화기구‘를 표방하며 출범한 경사노위는 출범 5개월 만에 태생적 한계를 노출했고 사회적 대화는 표류하고 있다. 동아일보DB
네덜란드에는 1950년 출범한 ‘사회경제위원회(SER)’라는 기관이 있다. 한국의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처럼 사회적 대화를 이끄는 중심축이다. 지난해 11월 13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SER를 방문해 베로니크 티메르하위스 사무총장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마침 현 정부가 야심 차게 준비한 경사노위가 출범을 앞둔 시점이라 사회적 대화가 성공하려면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 조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날 티메르하위스 사무총장은 먼저 ‘독립성’을 강조했다. 그는 “SER는 정부 지원을 전혀 받지 않는다. 정부가 바뀐다고 해도 ‘우리만의 조언’을 바뀐 정부에도 할 수 있다”며 “SER의 이런 독립성은 네덜란드 사회에서 강력한 힘을 갖도록 한다”고 말했다.

티메르하위스 사무총장이 그 다음으로 강조한 것은 ‘연속성’이었다. 그는 “노동, 일자리 정책은 정부가 바뀌어도 지속되고 연속적이어야 한다”며 “한국의 경사노위도 다음 정부가 들어섰을 때 전 정부의 정책을 한 번에 바꾸지 말고 더해 나가는 방식을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독립성과 연속성. 흔한 말이지만 가볍게 들리진 않았다. 같은 달 22일 경사노위는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첫 본위원회를 열고 공식 출범했다. 5개월 동안 경사노위는 사회적 대화의 원칙을 지키며 순항하고 있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의 경사노위는 이런 원칙을 지키기가 태생적으로 불가능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 독립성 없는 ‘기울어진 운동장’

경사노위는 기존 노사정위원회를 확대 개편한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다. 노사정위가 대기업과 정규직 노조 중심이었다면, 경사노위는 청년, 여성, 비정규직은 물론이고 중소·중견기업과 소상공인까지 참여시켰다. 사회적 대화기구의 위상과 대표성을 강화한다는 문 대통령의 공약을 반영한 것이다.

문제는 경사노위가 대통령 직속인 데다 완전한 ‘독립체’를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근로자와 사용자가 납부한 고용보험기금으로 운영하는 네덜란드의 SER와 달리 경사노위의 예산은 기획재정부, 조직은 행정안전부와 고용노동부에 종속된 구조다. 경사노위 관계자가 “뭔가 일을 하려면 정부에 읍소할 상황이 참 많다”고 말할 정도로 독립성이 결여돼 있다. 사회적 대화기구가 사실상 정부의 산하기관처럼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경사노위원장은 대통령이 위촉한다. 문 대통령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출신인 문성현 위원장을 위촉했다. 민노총 출신이 사회적 대화기구의 수장을 맡은 건 문 위원장이 처음이다. 1999년 2월 노사정위를 탈퇴한 민노총의 복귀를 유도하기 위해서였지만, 민노총은 끝내 복귀하지 않았고 경사노위는 태생부터 “노동계에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비판을 받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위촉한 김대환 전 노사정위원장 역시 ‘노동개혁’에 대한 신념이 강해 노동계가 강하게 반대하는 인사였다.

결국 과거 노사정위와 현 경사노위 모두 보수 정권에서는 경영계에 유리한 정책을, 진보 정권에서는 노동계에 유리한 정책을 추진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됐다. 사회적 대화기구의 필수 요소인 독립성을 갖추지 못한 채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드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경사노위가 앞으로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사회적 갈등기구’로 전락할 거라는 지적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 연속성 없는 정책으로 갈등만 증폭

올해 초 경사노위가 진행한 탄력근로제 확대 논의는 정책의 ‘연속성’을 상실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탄력근로제는 작업량에 따라 근로시간을 늘리고 줄여 법정 근로시간에 맞추는 제도다.

올해 2월 19일 서울 종로구 경사노위 회의실에서는 모처럼 노사정 대표들이 손을 맞잡으며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들 가운데에 선 이철수 경사노위 산하 노동시간제도 개선위원장(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은 “이번 (탄력근로제 확대) 합의는 희망과 연대의 신호탄”이라며 “노사 당사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양보와 타협으로 합의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이날 노사정 대표들은 주 52시간제의 대안인 탄력근로제의 단위기간을 최대 6개월로 늘리는 합의문에 서명했다. 현 정부 들어 처음으로 성사된 ‘사회적 대타협’이었다.

그러나 대타협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물거품이 됐다. 3월 7일 문 대통령 주재로 열릴 예정이던 경사노위 본위원회가 근로자위원 3명의 불참으로 열리지 못한 것이다. 본위원회를 통과하지 않은 합의문은 아무 효력이 없었다. 공을 넘겨받은 국회도 여당(최대 6개월로 확대)과 야당(최대 1년)이 대립하면서 진척이 없는 상태다.

문제는 2015년 9월 15일 당시 노사정위가 도출한 ‘노동시장 구조 개선을 위한 사회적 합의’(9·15 대타협)에서 탄력근로제를 넓히기로 이미 합의했다는 점이다. 당시 노사정 대표들은 주 52시간제를 1000인 이상 기업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하되 탄력근로제를 최대 6개월로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문 위원장도 취임 직후 “9·15 대타협은 굉장히 선진적인 합의”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 위원장이 언급했던 ‘희망과 연대의 신호탄’은 이미 4년 전에 ‘발사 준비’를 마치고 있던 셈이다.

그러나 한국노총이 정부의 2대 지침(저성과자 해고와 취업규칙 변경 지침) 시행을 빌미로 2016년 1월 합의를 파기하면서 합의문은 휴지 조각이 됐다. 특히 지난해 2월 국회가 주 52시간제 시행을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때도 탄력근로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경사노위가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했다면 탄력근로제 확대안은 이미 국회를 통과해 시행됐어야 한다. 결국 과거의 합의가 물거품이 되는 일이 이어지면서 갈등이 증폭되고 소중한 시간만 허비했다.


○ 꼬리가 몸통 흔드는 의사결정구조

민노총은 올해 1월 28일 대의원대회에서 경사노위 참여가 부결되자 강경 투쟁 노선을 강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민노총이 정말 정부와의 모든 대화를 거부하고 있을까. 민노총은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고용보험 심사위원회,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등 노동계 몫이 마련된 정부 위원회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자신들이 일정 정도 양보를 해야 하는 경사노위는 거부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원회는 빼놓지 않고 참여하는 모양새다.

경사노위가 탄력근로제 합의안을 의결하지 못한 것도 민노총의 ‘장외 압박’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본위원회는 청년, 여성, 비정규직 등 근로자위원 대표 3명이 불참하면서 의결이 무산됐다.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은 “소외계층 대표들을 겁박하고 회유해 사회적 대화를 무산시킨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태”라며 불참 배후로 민노총을 지목했다. 민노총의 이런 ‘전략’은 실제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단 3명만 불참해도 의결정족수 미달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이른바 ‘왜그 더 도그’(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현상)를 현실화시켜 경사노위를 힘없는 조직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고용부 국장으로 9·15 대타협 실무를 맡았던 정지원 법무법인 율촌 상임고문은 “민노총은 정부위원회나 청와대 등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창구를 다수 확보하고 있다”며 “정부가 민노총과의 교섭 창구를 경사노위로 일원화해 다른 창구로는 민노총이 뜻을 펼치기 어렵게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민노총이 장외 압박을 접고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사회적 대화에 참여할 수 있게끔 정부가 창구를 경사노위로 단일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 정부와 여당은 네덜란드, 아일랜드 등 유럽 선진국의 경제위기 극복 모델인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 내겠다고 공언해 왔다. 어느 한쪽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노동계와 경영계가 한 발씩 양보한 모델이다. 문 위원장도 “나의 절실함을 요구하려면 상대의 절실함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하지만 경사노위는 출범 5개월 만에 태생적 한계를 노출하며 표류하고 있다. 경사노위가 진정한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려면 먼저 기구의 독립성과 정책의 연속성, ‘교섭 창구의 단일화’라는 3원칙을 굳건히 다져야 한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경사노위#사회적 대화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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