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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에 맞서 상점 철시-예금 인출… 민족대표 2선조직 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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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에 맞서 상점 철시-예금 인출… 민족대표 2선조직 가동

안영배 기자 입력 2018-08-11 03:00수정 2018-08-1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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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제13화> 경제전쟁
어깨에 총을 멘 일제 군경이 상점 문이 일제히 닫혀 썰렁한 서울 중심의 한 상점가를 순찰하고 있다. 동아일보DB
1919년 3월 9일 경성 상인들이 일제히 상점 문을 닫아걸었다. 경성상민(京城商民) 대표자들이 작성한 ‘경성시 상민일동 공약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공약서는 △9일 일체 폐점할 것 △시위에 가담할 것, 단 폭행은 하지 말 것 △위약한 상점은 용서 없이 처분(응징)할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경성 1000여 상점이 동시에 철시(撤市)하고 상인들이 시위에 가담하자 조선총독부는 당황했다. 조선왕조 이래 어용상인 밀집거리인 육주비전(六注比廛·육의전)의 전통을 계승한 종로 상인들까지 영업 중단 손실을 각오하면서 완전 철시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3’)

상인 철시운동은 평양 인천 개성 등 지방으로 확산됐다. 경성의 노동자 파업과 동시에 전개된 상인 철시 운동은 착취와 수탈을 기본으로 하는 식민 지배 경영의 실핏줄을 마비시켜 일제에 타격을 줬다.

일본 정부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파악하고 조선총독부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에게 조속히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총독부는 총칼로 무장한 군경을 동원해 철시운동을 막으려 했다. 상인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점포 문을 열도록 위협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잠시 문을 열었다가도 무장 군경이 돌아서기만 하면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총독부는 상인들을 회유하는 술책도 폈다. 총독부의 지시를 받은 경성상업회의소가 상인들에게 개점을 종용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3·1운동으로 구속된 한인(韓人)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삼엄한 경비 때문에 영업이 안 되므로 일경의 시가(市街) 경계를 풀 것 등을 조건으로 내세워 일제를 당혹케 했다.(‘매일신보’ 1919년 3월 11일) 한 달 넘게 이어지는 경성의 철시운동은 4월 중순 일단 멈추었다.

철시 운동과 함께 은행의 거액 인출 운동도 전개됐다. 이는 현금 유동성을 차단해 일본계 은행을 파산시키려는 의도였다. 중역과 주주 모두 친일파로 구성돼 ‘국적은행(國賊銀行)’이라 불리던 한성은행에서는 3월 9일과 10일 이틀 만에 무려 20만 원에서 25만 원의 거액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조선총독부 경무국 보고)

○ 민족대표 2선 조직 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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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의 철시 및 일본계 은행에 대한 예금인출 운동은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다. 바로 3·1운동 2선 조직의 ‘숨은 힘’이 작용한 결과였다.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체포된 직후 10여 명의 ‘2선 조직’이 곧장 가동했다. 이들은 지속적인 운동 전개를 위해 33인 독립선언서 서명자 명단에서도 빠져 있었다.

상인들 철시운동 배후로 꼽히는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는 2선 조직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3월 1일 밤 송진우는 북촌 계동 중앙학교 뒷산의 비밀 연락 장소로 학생 대표들을 소집해 일인(日人)들의 본토 철수를 요구하는 운동, 일인과의 물품 매매를 거절하는 철시 운동, 총독부에 대한 납세 거부 운동, 한인 관공리(官公吏)들의 사직 운동, 일인들이 세운 공장에서의 동맹 파업 및 학생들의 동맹 휴학 등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제시했다.(‘고하 송진우 전기’)

일제와의 ‘경제 독립전쟁’을 선포한 고하는 3월 5일 학생이 주체가 된 만세운동을 격려하기 위해 남대문역(서울역)까지 방문한 것을 끝으로 일경에 붙잡혀갔다. 고하의 손자 송상현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은 당시 고하는 일본인 형사에게 패륜적인 고문을 당했다고 밝혔다.

“고하를 발가벗겨 기둥에 묶어놓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훈련된 경찰견으로 하여금 무차별적으로 물게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고하는 생식 능력을 잃어 다시는 자손을 가질 수 없게 됐다는 게 집안 내의 정설이다.”(송상현 회고록, 신동아 2018년 2월호) 송 회장은 고하의 양손자(養孫子)다.

일제가 잔인무도한 고문을 하면서 밝혀내려고 한 것은 인촌 김성수의 3·1운동 가담 여부였다. 그러나 고하는 “김성수는 그때 향리(鄕里)에 가 있었다”며 끝내 부인했다.(송진우에 대한 경찰조서). 일제 수사당국은 송진우와 현상윤이 중앙학교 교장 사택에서 3·1운동을 모의한 것을 알았지만, 인촌이 관련된 증거를 밝혀내지 못해 중앙학교를 폐쇄할 수 없었다.(‘중앙백년사’)

○ 손병희의 삼전론

한편 3·1운동 이면에는 자금을 동원하려는 민족세력과 이를 차단하려는 일제와의 치열한 물밑 싸움도 있었다.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종교단체들이 협력해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는 거사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3·1운동 33인 민족대표 지도자인 손병희는 철저한 준비와 돈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운동은 공염불에 그치기 쉽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1884년 갑신정변을 목격하고 1894년 동학혁명을 직접 겪으면서 얻은 경험이었다.(김삼웅, ‘의암 손병희 평전’)

손병희의 실사구시형 리더십은 1902년 발표한 ‘삼전론(三戰論)’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앞으로 세계 대세는 세 가지 싸움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첫째 도전(道戰)은 국민의 정신을 계발하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이며, 둘째 재전(財戰)은 국가의 산업을 개발해 자립할 수 있는 국력을 키워야 하며, 셋째 언전(言戰)은 외국의 사정에 밝아 외국과의 의사소통이 원활케 하는 것이다.”

독립운동에 ‘삼전’을 대입하면 ‘도전’은 독립운동의 당위이자 신념체계, ‘재전’은 독립운동의 돈줄, ‘언전’은 대내외 홍보전과 정보력을 의미한다. 손병희는 이러한 삼전론을 기조로 천도교를 운영해왔다.

당시 천도교는 전국에 35개 대교구와 193개 교구 조직을 갖추고 300만 교인(천도교 측 추산)을 가진 우리나라 최대 종단이었다. 매월 올라오는 성금으로 본부인 중앙총부의 경상비를 충당하는 것은 물론 재정난에 시달리는 20여 개 사립학교 및 언론출판 사업을 유지했다. 그렇게 하고서도 매월 수천 원씩 예금할 정도로 재정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천도교 예금은 함부로 돌려쓸 수 없었다. 일제는 진작부터 천도교의 자금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종교계 헌금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경성 북촌 송현동 천도교 중앙총부를 관할하는 종로경찰서는 매월 천도교의 재무 회계 내용을 보고받는 등 철저하게 감시했다.(천도교중앙총부 사회문화관, ‘손병희 선생과 3·1운동’)

○ 피눈물 묻은 독립자금

3·1운동 당시 서울의 상인들이 철시 운동을 벌이자 일제 군경이 강제로 상점 문을 여는 장면(1919년 출간 ‘독립혈전기’).
손병희는 3·1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계책을 썼다. 경운동에 새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 건물을 짓는다는 명분으로 교호(敎戶)당 10원 이상씩 특별 건축 성금을 받기로 했다. 모금운동이 시작되자 전국 교인들이 한 푼이라도 더 보태려고 발 벗고 나섰다. 집안 패물은 물론 논과 밭, 황소까지 팔아 성금을 냈다. 손병희의 부인 주옥경(1894∼1982)은 “남자들은 짚신을 삼고 여자들은 삯바느질 품삯으로 모으고 모은 피눈물 나는 돈이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부인들이 아랫배에 차고 오기도 하였고, 또는 허리띠에다 누벼오기도 하고, 여하튼 부인들의 활약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거두어서 독립자금에는 물쓰듯 했습니다마는, 우리는 한국(산) 좁쌀은 먹지 못하고 호(胡·중국산)좁쌀을 먹었습니다.”(주옥경, ‘독립선언 반세기의 회고’, 신인간 1969년 3월호)

천도교인들의 ‘수상한 헌금’에 대해 일제도 그냥 지켜보지는 않았다. 기부행위금지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천도교 중앙총부가 한성은행, 상업은행, 한일은행 등에 예금해 놓았던 6만6600원(당시 쌀 한 가마 3원)을 지급 정지시켰다. 이미 받은 성금은 전액 교인들에게 반환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교인들은 헌금을 돌려받은 척 가짜영수증을 제출하거나 성금 액수를 10분의 1로 줄이는 등의 방법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했다. 이렇게 해서 약 100만 원이라는 거금이 모였다. 실제 건물 건축자금 27만여 원을 제외한 대부분 성금은 3·1독립운동과 독립군의 군자금에 사용됐다.(천도교중앙총부, ‘천도교 약사’)

천도교 측은 당시 3·1운동 전후로 독립운동 자금으로 최소 500만 원을 쓴 것으로 추정했다.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참여 경비로 중국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원 김철을 통해 3만 원을 보낸 것(이광수의 증언)을 비롯해 상하이 임시정부와 만주로 보낸 군자금만도 수십만 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독립선언 반세기의 회고 좌담회’, 신인간 1969년 3월호)

천도교는 이후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3·1운동 총본부인 중앙총부는 쑥대밭이 됐다. 용산의 일본군 1개 대대가 10여 일간 점령하면서 종단 업무가 마비됐다. 손병희 이후 천도교를 이끌어갈 대도주 박인호를 비롯해 기독교 측에 3·1운동자금으로 5000원을 지불했던 금융관장 노헌용, 경성대교구장 장기렴, 보성사 인쇄소 감독 김홍규 등 중견 간부가 모조리 체포됐다. 중앙총부가 별도로 보관하던 120만 원의 거금은 모두 압수당했다. 성금도 4분의 1로 크게 줄어 중앙총부 직원들의 급료마저 지불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천도교가 운영하던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등도 운영하기 어려워 경영권을 넘겨야 했다.(‘천도교약사’)

게다가 3·1운동에 연루된 교인들이 살상당하고 가택이 다수 소실되는 등 신변까지 위협받자 탈교(脫敎)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동학(천도교)을 하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이자 3·1운동의 핵심 기획자인 최린의 일화도 천도교 내에서는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3·1운동이 마무리된 뒤 조선총독부는 손병희 사후 천도교 내 실질적 지도자인 최린을 협박했다. “일본에 협조하면 천도교를 살려둘 것이요, 협조하지 않으면 3·1운동의 주범인 천도교단을 말살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최린은 일본의 협박을 교단 원로들에게 설명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최린은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일본에 협조하면 내가 죽고, 협조하지 않으면 교단이 죽을 것이니, 내가 죽는 길을 택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김혁태의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의암 손병희 선생의 구국정신’)

최린은 1929년 천도교 도령(최고 지도자)에 취임하면서 그 자신이 ‘죽는’ 친일(親日)의 길을 걸어갔다.

일제를 상대로 천도교가 치른 재전(財戰)은 천도교의 쇠퇴로 이어졌지만 민중의 마음속에 자주독립과 민족주체 정신을 깊게 새겨놓았다. 그 결과 일제에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비무장 독립전쟁은 일화불매(日貨不買)운동, 물산장려 운동 등 경제 민족주의 운동으로 확산됐다.(김영호의 ‘3·1운동에 나타난 경제적 민족주의’,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3·1운동을 성공한 운동으로 평가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천도교, 민족대표들 가족 생활비까지 지원… 김성수-안희제-윤황후도 ‘숨은 자금원’▼

막대한 자금 필요했던 3·1 독립운동, 돈줄은…


조선의 마지막 황족. 왼쪽부터 순종, 고종, 독립운동 자금을 댄 순종비 윤황후. 동아일보DB
3·1운동은 자금 면에서는 천도교가 운동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병희는 33인 민족대표들의 옥바라지는 물론이고 남겨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달 1인당 10원씩 생활비를 지원했다.(이종일의 ‘묵암비망록’) 목숨을 걸고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머리를 내민 민족대표들의 의기(義氣)에 대한 보답이었다. 천도교가 3·1운동의 종가(宗家)로 자부하는 것도 3·1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졌기 때문이다.

3·1운동에는 천도교 외에 ‘숨은’ 자금원도 여럿 있다. 준비 단계에서는 인촌 김성수가 꼽힌다. 48인 민족대표 중 한 명인 김도태는 “(기독교계 대표인) 이승훈 씨의 관서 방면 공작비로 김성수 씨가 2000원인지 3000원인지를 내놓았다”고 증언했다.(동아일보 1949년 3월 1일)

안희제(1885∼1943)는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일행의 활동비로 2000원을 쾌척했다.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하던 안희제는 장덕수를 통해 상하이의 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기꺼이 거금을 내놓았다.(이경남, ‘설산 장덕수’)

조선 황족도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순정효황후)는 친오빠 윤홍섭의 부탁을 받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줬다. “황실을 부흥하기 위한 것이 아닐지라도 돈을 융통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윤황후는 자신이 쓸 내탕금에서 10만 원을 융통해 만들어 줬다. 윤홍섭은 이 돈을 해공 신익희에게 넘겨주었고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사용됐다.(유광렬의 ‘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74년 3월 2일)

한편 3·1운동 과정에서 자금을 떼먹은 사람들도 있었으나 끝이 좋지 않았다. 천도교 간부들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경성의 객줏집 주인들에게 거금을 맡겨두곤 했다. 그런데 한게찬이라는 장사치는 만세운동이 끝난 후 일경에 신고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돈을 가로챘다. 그는 자가용까지 사서 거들먹거리며 살았으나 가게가 폭삭 망했다.(‘독립선언 반세기의 회고 좌담회’)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3·1운동#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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