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왕 조용필 히트곡 ‘허공’, 사실은 신군부 비판한 노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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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 전문기자의 人]데뷔 50년 작곡가 정풍송

[1]작곡가 정풍송 씨가 서울 J스튜디오에서 새로 만든 곡의 반주 음악을 녹음하고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2]조용필이 정 씨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미워 미워 미워’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 [3]1986년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허공’으로 대상을 받은 조용필, 정 씨, 임정수 지구레코드 회장(오른쪽부터).
[1]작곡가 정풍송 씨가 서울 J스튜디오에서 새로 만든 곡의 반주 음악을 녹음하고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2]조용필이 정 씨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미워 미워 미워’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 [3]1986년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허공’으로 대상을 받은 조용필, 정 씨, 임정수 지구레코드 회장(오른쪽부터).
김상철 전문기자
김상철 전문기자
지난달 17일 방송된 KBS ‘가요무대’는 중견 대중음악 작곡가 4명의 히트곡으로 꾸며졌다. 이날 마지막 무대에 오른 작곡가는 정풍송 씨(76)였다. 정 씨가 피아노를 치며 조영남이 노래했던 자작곡 ‘옛 생각’을 부르자 객석에서 큰 박수가 쏟아졌다. 가요무대 오프닝과 엔딩 타이틀 음악으로 연주되는 주제가도 정 씨가 작사, 작곡한 곡이다.

한국 대중음악 대표 작곡가인 정 씨가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가수의 음반 취입용 노래, 영화음악, 방송가요 등으로 지금까지 작곡한 노래는 2000여 곡에 이른다. 데뷔 이후 매년 50곡가량 지은 셈이다. 그가 만든 노래는 패티김 이미자 최희준 조영남 조용필 인순이 최진희 김연자 설운도 주현미 등 당대 인기가수들이 불렀다. 수많은 히트곡 중에서 가장 애착을 느끼는 노래는 ‘웨딩드레스’와 ‘허공’이다.

○ 베트남 파병 때 만든 데뷔곡

정 씨는 1967년 ‘아카시아의 이별’을 음반으로 발표하며 대중음악계에 첫발을 디뎠다. 아카시아의 이별은 1965년 청룡부대원으로 베트남에 파병됐을 때 만든 노래다. 당시 베트남은 총포 소리가 끊이지 않는 전쟁터였지만 달밤은 유난히 밝았다. 문득 고향이 생각났다. 경남 밀양의 명소인 영남루가 있는 아동산에는 계절 따라 많은 꽃이 피었다. 개나리 벚꽃 아카시아 등이 만발하면 꽃잎들이 춤추듯 휘날려 장관을 이뤘다. 그때 멜로디가 떠올라 달빛 아래 지은 곡이 아카시아의 이별이다. 가사는 13개월간의 베트남 파병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뒤 붙였다.

한상일이 부른 ‘웨딩드레스’는 1969년 ‘아마도 빗물이겠지’를 타이틀곡으로 발표한 첫 작곡집 앨범에 담긴 12곡 중 한 곡이다. 당시로선 드물게 웨딩드레스와 아마도 빗물이겠지 등이 동시에 히트해 주목을 받았다.

정 씨는 작곡가 데뷔 전 생활비를 벌려고 나이트클럽 악단에서 피아노를 쳤다. 클럽 연주곡이 미국 팝송과 일본 노래 위주여서 늘 아쉬움을 느꼈다. 마침 신상옥 감독이 운영하던 국내 최대 영화사 신필름에서 신성일과 윤정희 주연 영화 ‘먼 데서 온 여자’의 주제가 작곡을 맡았다. 이 기회에 외국에서도 불릴 수 있는 곡을 만들기로 했다. 신성일과 윤정희가 환상 속에서 왈츠를 추는 장면에 맞춰 만든 노래가 왈츠곡 웨딩드레스였다. 발표하자마자 크게 히트했다. 종전에 없던 새로운 멜로디의 웨딩드레스가 방송되자 많은 사람이 외국 곡을 번안해 만든 것으로 오해했다.

주제가는 히트했으나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신필름은 웨딩드레스를 타이틀로 영화를 다시 만들기로 했다. 대본이 나왔으나 제작이 늦어졌다. 그때 변장호 감독이 ‘웨딩드레스’를 영화로 만들겠다며 타이틀과 노래 사용을 승낙해 달라고 했다. 신필름에서 영화 제작 중이라며 거절했다.

얼마 뒤 영화 ‘눈물의 웨딩드레스’가 개봉됐다. 변 감독의 작품이었다. 영화 홍보 때 한상일의 웨딩드레스를 배경음악으로 깔았다. 영화음악을 하며 알고 지내던 사이라 항의 한마디 못 하고 넘겼다. 영화 ‘눈물의 웨딩드레스’가 히트하는 바람에 웨딩드레스 곡명을 지금도 ‘눈물의 웨딩드레스’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 조용필, 미워 미워 미워 그리고 허공

1980년 지구레코드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전속가수 조용필이 찾아와 “크게 히트할 곡 부탁합니다”라고 했다. 새 곡을 만들려다 작사, 작곡해 뒀던 ‘미워 미워 미워’를 주기로 했다. 조용필을 불러 연습을 시켰더니 “선생님, 이겁니다”라며 만족해했다. 음반이 100만 장 넘게 팔린 것이 공인돼 미국 암펙스 골든릴상을 받았다. 일본 소니 측이 일본어 음반을 내고 일본 A급 가수 16명이 리메이크할 정도로 대박을 쳤다. 당시 한국이 국제저작권협회에 가입하지 않아 저작권료는 한 푼도 없었다.

조용필에게 다음 곡으로 ‘허공’을 주기로 했다. 이 곡을 만들 때 가졌던 울분과 한을 토해낼 가창력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1982년 반주 음악을 녹음했지만 ‘미워 미워 미워’ 히트로 조용필이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느라 바빠 노래 녹음을 못 했다. 3년 뒤 노래를 녹음해 음반을 내놓자마자 국민가요가 될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허공은 사연이 있는 정 씨의 대표곡이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렸다. 민주화가 곧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12·12쿠데타로 신군부가 등장해 물거품이 됐다. 허망하고 참담한 심정을 삭일 수 없어 울면서 펜을 들었다. ‘허공’이 제목으로 떠올랐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민주…’

당시 노래는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둘째 줄 가사 ‘너무나도 멀어진 민주’로는 검열을 통과하지 못할 게 뻔했다. 지인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됐을 때 모함을 당했다는 진정서를 냈다가 경찰 특수수사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아픈 기억도 되살아났다.

고민 끝에 ‘민주’를 ‘그대’로 바꾸기로 했다. 단어 하나를 바꾸자 사랑 타령 분위기로 탈바꿈했다. 연막을 더 쳐야 할 것 같아 1절 ‘설레이던 마음도 기다리던 마음도’를 2절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와 맞바꿨다. 사전 심의를 신청한 뒤 들통날까 마음을 졸였으나 다행히 그대로 통과했다.

사실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 이야기’는 김영삼(YS) 김대중(DJ) 두 사람이 ‘서울의 봄’ 때 적극 협조했더라면 이런 불행은 없었을 것이라는 원망스러운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정 씨는 “허공 가사를 원래대로 했다면 당시엔 더 히트했을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기억되고 불리는 노래로 남지 못했을 것”이라며 “대중가요 가사에서 은유와 비유의 위력을 실감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정 씨는 1969년 지은 ‘잊으려 했는데’부터 작사가 필명으로 ‘정욱’을 썼다. 다른 작곡가와는 달리 작사, 편곡, 지휘, 디렉팅까지 하고 히트곡도 늘자 선배들이 “혼자 다 해먹어라”라고 핀잔을 줬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 저작권료가 정착되기 시작해 정욱이 필명이라고 밝혔다.

○ 김동진 선생에게 배운 건 최대 행운

그의 부모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광복 직후 집안 대대로 살아온 고향인 밀양에 정착했다. 일본에서 가져온 축음기와 라디오로 노래를 듣다 보니 음악을 좋아하게 됐다. 집 뒷마당에 있던 대나무에 구멍을 내 피리를 만들고, 미군 전화선에서 강철 줄을 뽑아 하프 비슷한 악기도 만들었다. 따로 배운 적이 없는데도 만든 악기로 연주하자 주위 사람들은 신동이라고 불렀다. 집안 어른들은 “양반 집안인데 풍각쟁이 되려고 하느냐”며 호통을 쳤다.

밀양중 2학년 때 친구가 노래를 불렀다. ‘내 고향 남쪽바다/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순간 몸에서 전율이 느껴졌다. 저런 노래를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곡명을 물었더니 가곡 ‘가고파’라고 했다. 한참 뒤 김동진 선생이 작곡했다는 것을 알고 김 선생에게 작곡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밀양농잠고를 마치고 김 선생이 있던 서라벌예술대 음악과 작곡 전공에 지원해 합격했다. 첫 개인레슨 시간에 김 선생이 “입시 때 작곡을 잘했던데 누구에게 배웠느냐”고 물었다. 시골이라 레슨 선생이 없어 책을 사 혼자 공부했다고 하자 김 선생은 “천재인데…”라고 했다.

작곡 과제를 받아 클래식, 세미클래식, 대중가요 스타일로 3곡을 지어 냈다. 김 선생이 대중가요풍을 보더니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물었다. “전공한 사람만 하는 음악보다 미국 작곡가 포스터처럼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음악이 좋다고 생각한다”라고 대답했다. 김 선생이 “네 생각이 그러면 그렇게 해라”라고 해 저속한 작사나 작곡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김 선생은 수십 년간 작곡하면서 쌓은 여러 노하우를 레슨 때 가르쳐 주었다. 이를 지켜 만든 곡이 ‘웨딩드레스’, ‘석별’, ‘옛 생각’ 등이다. 졸업 전에 김 선생은 “가르친 많은 학생 중에 작곡 재능은 네가 가장 좋은 것 같다. 훌륭한 작곡가가 될 것이다”라고 격려해 주었다.

정 씨는 “김 선생을 은사로 모신 것이 인생 최대의 행운”이라고 했다. 그래서 김 선생이 94세를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매년 1월 1일과 생일인 3월 22일 찾아뵙고 문안을 드렸다.

○ 100년 가는 명곡 만드는 게 꿈

현역으로 활동 중인 정 씨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젊게 보이고 활력이 넘친다. 건강 비결로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평생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요리 솜씨가 좋은 부인이 해주는 음식을 안 가리고 잘 먹는 것을 들었다.

정 씨는 최근 일본에서 널리 불릴 곡을 달라는 일본 음반회사의 요청에 따라 한 달간 새로 만든 곡과 발표하지 않았던 노래 중에서 골라 40곡을 보냈다. 또 어린이재단을 위해 ‘초록우산’, ‘주인공’을 작곡해 재능기부를 하는 등 어린이를 돕는 일에도 힘을 쏟고 있다.

“대중가요는 그 시대 그 사회의 거울이다. 작사, 작곡가는 이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고약한 가사나 뜻 모를 노래, 곡 표절 등은 뿌리 뽑아야 한다.”

정 씨는 늘 메모지와 펜을 들고 다니며 가사나 멜로디가 떠오르면 바로 곡을 쓴다. 100년, 200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고 언제 들어도 아름다움과 감동을 주는 명곡을 만드는 게 꿈이다.
 
▼김수환 추기경 헌정 앨범 만든 까닭은▼

金추기경 ‘친북’ 발언으로 곤욕… 위로 전하고자 사재 털어

김수환 추기경이 ‘김수환 추기경님께’ 앨범을 받은 뒤 정풍송 씨와 악수하고 있다. 정풍송 씨 제공
김수환 추기경이 ‘김수환 추기경님께’ 앨범을 받은 뒤 정풍송 씨와 악수하고 있다. 정풍송 씨 제공
2004년 김수환 추기경이 열린우리당 지도부를 만난 자리에서 “나라의 전체적 경향이 반미 친북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 뒤 곤욕을 치렀다. 면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으나 인터넷 매체가 ‘민족의 내일에 걸림돌’이라고 추기경을 비판했고 사이버 공격도 잇따랐다.

정풍송 씨는 존경받는 국가 원로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한 말씀인데 자신의 코드와 맞지 않는다고 추기경을 함부로 폄훼하는 것을 보자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 추기경이 힘들고 약한 사람을 위해 애쓰던 모습, 총칼에 쫓기는 학생을 위해 독재정권에 맞서던 모습 등을 담아 노래를 만들었다. 여기에 추기경을 위로하는 편지 형식 내레이션을 더해 음반 제작에 나섰다.

가수에게 노래를 맡기자 “이 노래 부르면 내일부터 가수 생활 못 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당시 울분으로는 중도에 그만둘 수 없어 직접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대학 시절 작곡을 잘 하려면 피아노뿐만 아니라 성악을 알아야 한다는 김동진 선생의 조언에 따라 틈틈이 성악을 공부했기에 녹음을 무사히 마쳤다. 가수 예명은 정의파(鄭義播·나라에 정의를 심는다는 뜻)로 정했다.

레코드 회사를 찾아가 음반을 내자고 했더니 “세무조사 받고 회사 문을 닫게 된다”며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이 노래 발표 못하면 내가 화병으로 죽는다”고 아내를 을러 사재(私財)로 ‘김수환 추기경님께’ 음반을 제작했다. 당시 상황 탓에 노래는 한 번도 방송되지 못했다.

일부 신문에 음반 제작 관련 기사가 실렸다. 한 수녀가 “추기경님이 한번 뵙자고 한다”고 전화로 알려와 서울 혜화동성당으로 찾아갔다. 김 추기경은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이런 대접 받아도 되느냐”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대화 중에 “저는 종교가 없지만 모친과 아내가 절에 다녀 불교 쪽에 가깝다”고 하자 김 추기경은 가톨릭 신자일 것으로 예상했던지 놀라는 표정을 보였다. 그래서 “자신의 양심이 종교라고 생각한다”라고 하니 추기경은 “좋은 말씀이다”라고 화답했다.

정 씨는 “‘추기경님께’ 음반 제작은 대중음악 작곡가로서 사명을 잊지 않고 작으나마 의무를 이행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김상철 전문기자 sckim007@donga.com
#정풍송#조용필#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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