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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의 연극인 열전]배우 지현준 “좋은 배우는 좋은 사람이다”

심규선기자

입력 2017-03-21 11:40:00 수정 2017-03-21 11:4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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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지현준은 현학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 현학적이라는 것은 배우관이 상당히 논리적이라는 뜻이고, 현실적이라는 것은 ‘좋은 배우’가 되는 길을 연습이나 연기에서 찾지 않고 ‘좋은 사람’에서 찾는다는 뜻이다.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본인이 그걸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목소리, 목소리, 목소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3월 14~19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의 연기보다 그의 목소리에 빨려 들어갔다. 그의 목소리는 전화로 잠깐 들은 적이 있지만 무대 위에서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중저음이라거나 베이스 톤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의 목소리는 울림으로 흡인했다.

나중에 내가 왜 그의 목소리에 반응했는지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일본 다카라즈카(寶塚) 극단이 자랑하는 최고 최장 레퍼토리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주인공 오스칼을 떠올렸던 것 같다. 잘 알려져 있듯 다카라즈카 극단의 단원은 전원이 여성이다. 당연히 여자가 모든 남자역을 맡는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게 된다. 더욱이 단원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베르사이유 장미’의 오스칼역은 남장 여자역이다. 딸을 아들로 키운다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배역은 다른 남자역과는 달리, 연기와 목소리에서 절제된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요구한다. 그게 오스칼역의 큰 매력이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오스칼을 떠올린 것은 그의 목소리가 독특하게 여성성과 남성성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고 나 혼자 착각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누구인가. 배우 지현준(39)이다. 20일 동아일보에서 그를 만났을 때 ‘여성성’에 대한 생각은 빼놓고 “혹시 ‘성우가 됐어도 좋았겠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느냐”고 물어봤다. “그런 적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내 주관적 해석이 맞는다는 것도 아닌데, 나는 속으로 ‘역시’ 하고 그의 대답에 만족했다. 물론 그는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2003년에 데뷔했다. “모든 역이 다 애착이 간다”는 상투적인 말은 빼놓고 가장 인상에 남는 역을 3개쯤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내 질문이 상투적이다. 그는 ‘햄릿’(2003년)과 1인 35역의 모노드라마 ‘나는 나의 아내다’(2014년), 화가 이중섭을 연기한 ‘길 떠나는 가족’(2014년)을 꼽았다.

“‘햄릿’을 맡은 게 데뷔하던 해다. 연극이 뭔지도 모를 때 정말로 큰 역을 맡았던 것 같다. 햄릿에는 연극과 삶에 대한 명대사가 많다. 그래서 하면 할수록 이 역할에 대한 욕심이 났던 것 같다. ‘나는 나의 아내다’는 내가 한 첫 모노드라마다. 모노드라마는 조금 연배가 있어야 할 수 있다는 말도 있는데 어느 선배가 ‘네가 잘 할 수 있는 역’이라고 격려를 해줬다. 강량원의 연출로 더 빛난 작품이다. ‘길 떠나는 가족’의 주인공 이중섭은 턱(일본어로 아고)이 길어 ‘아고 리상(あご李さん)’이라고 불렸는데 그의 얼굴이나 목소리가 나와 비슷해서 딱 맞는 역이라는 말을 들었다.”

2010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한 ‘햄릿.’ 햄릿역을 맡은 지현준이 관객들이 입장하기 전에 책을 보면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장면이다. 햄릿은 2003년 그가 배우가 되자마자 맡았던 큰 역이었다. ‘햄릿’은 동시대화를 위해 완전히 해체해서 공연하는 사례가 많지만 지현준이 연기한 이 햄릿은 한국적인 해석을 하면서도 텍스트에도 충실하려 했던 연극이었다. 지현준 제공


세 작품에 대한 그의 소회는 그 다음에 더 무게가 있다.

“‘햄릿’을 할 때는 세계문학전집에 들어있는 작품의 하나일 뿐이고, 동화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하라면 힘들 것 같다. 연극을 알면 알수록 두려운 역이다. 여장 남자로 살았던 샤로테라는 인물을 연기했던 ‘나는 나의 아내다’는 처음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작은 일상에서 기적을 발견하고, 소외된 사람, 특별하지 않은 사람,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의 일대기도 매우 소중하다는 메시지가 여러 사람에게 울림을 준 것 같다. 사람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이중섭은 모든 걸 다 사랑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다. 이분처럼 나도 내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 작품이다(어떤 배역이 현실 생활에도 영향을 주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했다. 너무 함몰돼도 안 되겠지만 그때그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영향을 주게 마련이라고 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느낀 건데, 그는 약간 현학적(衒學的) 사변적(思辨的)인 구석이 있다.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양한 역과 다양한 평가, 다양한 문제와 접하며 이에 포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조금 높은 차원의 그 무엇을 찾으려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노력한 결과로 보인다. 나쁠 것은 없다. 그만큼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니. 다만, 너무 ‘폼나는’ 말만 하다 보면 그의 본심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를 인터뷰한 여러 기사들을 읽으면서도 살짝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인터뷰에 단골로 나오는 ‘덜어낸다’ ‘꺼낸다’ ‘벗는다’의 의미를 쉽게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덜어낸다’는 것은 연기를 할 때 내가 갖고 있는 아집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 등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뜻이다. 또한 주변에서 말하는 옳다 그르다, 잘한다 못한다라는 등의 평가에서도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마음도 들어 있다. (그는 ‘꺼낸다’와 ‘벗는다’는 비슷한 뜻이라고 했다.) 무대 위의 배우는 숨기고 싶은 것, 부끄러운 것조차도 꺼내 보여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발가벗고 무대 위에 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배우는 그런 갈등의 경계선을 서성이며 무대에 서기 때문에 괴롭고, 허무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때론 시원하기도 하다.”

그의 설명을 듣고 두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주변의 평가에서도 자유로워지면 독선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니냐. 연기라는 게 원래 자기를 숨기고 제3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인데 발가벗을 필요까지 있느냐. 첫 질문에 대해 그는 “주변과의 관계가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가 됐으면 좋겠다는 뜻”이라고 했다. 즉 일방적으로 평가를 하고,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와 밖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연극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 연기에 대해 나와 주변의 평가가 다를 때는 ‘다 듣는 편’이다. 듣는다는 것은 몸에 새겨졌다고 ‘믿는’ 것으로, 나중에 연기에 반영된다는 뜻”이라고 했다. ‘자유’를 원하지만, 그것에 이르는 ‘부자유’도 수용하겠다는 의미로 읽혔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배우는 무대에 올라 제3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배우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관객들이 그걸 가장 먼저 안다고도 했다. 나는 단순하게, 홀쭉이 역할을 하는 배우가 뚱뚱하다면 그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이미 실패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나는 자신에게 엄격한 지현준의 이런 태도가 앞으로 다른 배우와 차이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그는 이 테마에 대해 나름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듯했다.

“배우가 무대에서 서는 순간, 그 배우의 삶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모든 배우가 자신이 맡은 배역에 대해 열심히 해석하고 그 역을 더 잘 연기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똑같은 배역도 배우에 따라 맛이 다르다. 왜 그런가. 연기에는 그 배우가 살아온 과거와 지금의 일상이 투영되기 때문 아니겠는가. ‘배우의 뒷모습이 보인다’는 것은 그런 뜻일 것이다.”

역에 맞지 않는 배우가 그 역을 연기하는 걸 그는 “거짓말”이라고까지 했다. 햄릿에 나오는 “연극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혼의 거울을 들이대는 것”이라는 대사에 빗대 배우는 영혼의 거울을 깨끗이 닦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도 했다. 물론 성직자 역할을 하는 배우가 꼭 도덕적이어야 하느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으나, 나는 배우 지현준이 갖고 있는 ‘기준’을 공박할 생각이 없다. 그는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는 배우에 입문한 직후 종교(기독교)를 갖고 술과 담배까지 멀리하며 ‘바른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먼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도 했다. 그가 종교를 갖게 된 것은 여자 친구의 권유도 있었지만, 연극이라는 새로운 일과 맞닥뜨리며 무엇을 추구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다.

그는 데뷔 이후 3월 현재 연극 33편, 무용 7편, 뮤지컬 8편, 퍼포먼스극 2편, 영화 5편, TV드라마 3편에 출연했다(그가 만든 자기소개서를 기준으로 삼았다). 다작이냐는 질문에 그는 “적당한 것보다 약간 많은 편이지만, 관리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다작보다 장르의 다양성에 주목한다. 그는 어렸을 적 피아노 선생님이었던 어머니의 권유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기른 음악적 감수성이 뮤지컬 진출에 도움을 준 것은 물론이다. 그는 2012년 뮤지컬 ‘모비딕’에서 작살잡이 퀴퀘그 역을 맡아 그 해 ‘더 뮤지컬 어워즈’ 남우 신인상을 받는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노래를 못하느냐”는 구박을 받았지만 뮤지컬에서도 통할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는 “뮤지컬에서도 다양한 캐릭터를 맡을 수 있는 수준까지 갔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그는 요즘 성악 레슨도 받고 있다. 뮤지컬에서는 테너나 하이 바리톤이 각광받기 때문이다.

그가 트러스트 무용단에 들어가 3년 동안 거의 단원처럼 있으면서 몸의 움직임까지 배웠다. 흔히 연극을 언어의 예술로 생각하기 쉽지만 몸도 매우 중요한 의사전달 수단이다. 그래서 말보다는 몸을 이용해서 연극을 만드는 걸 즐기는 연출가도 적지 않다. 그는 “트러스트 무용단에서 전문가의 수준은 넘어서지 못했지만, 사람답게 지현준답게 쓸 수 있는 몸을 발견했다. 그럼 무대에 설수 있다”고 했다.

‘나는 나의 아내다’에서 지현준은 1인 35역을 해냈다(2013년 두산아트센터). 그는 젊은 나이에 모노드라마에 도전해 성공함으로써 이 작품으로 동아연극상 유인촌신인연기상과 대한민국 연극대상 남자 신인연기상을 받았다. 연기에 입문한 지 10년 만에 신인상을 받고 그는 “다시 겸손히 첫발을 내딛도록 하는 소식”이라며 기뻐했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그는 올해로 14년째 배우를 하고 있다. ‘나는 나의 아내다’로 2013년 대한민국 연극대상 남자 신인연기상, 2014년 동아연극상 유인촌신인연기상도 받았다. 상보다 더 주목할 것은 그는 대부분의 연극에서 주연을 맡았고, 화제작이나 문제작이 많다는 점이다. 즉 그는 성공한 배우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다. 장르 파괴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종종 순혈주의를 강요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연극, 춤, 뮤지컬을 콜라보레이션하면 좋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외국에서는 그런 엔터테이너들이 많은데 말이다.”

사실 내게 그의 희망을 검증할 만한 지식은 없다. 다만, 연극 하나만 놓고 봐도 고전을 해체하거나 비틀고, 심지어는 성별까지 바꾸면서 동시대의 연극으로 만드는 작업이 새로울 것도 없는 시대에 장르간에 벽을 쌓고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철학적 기반이나 고민 없이 상업성이나 대중성에 아부하는 것은 경계해야겠지만, 벽을 깰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연출가나 배우의 노력은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배우 지현준은 탄생부터가 조금 연극적이다. 그는 동아방송대와 방송통신대(방송보도제작 전공)를 졸업하고 KBS 다큐멘터리 PD가 됐다. 그에게 실례일지 모르지만 세속적인 의미에서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일주일 만에 그 성공에 질려버렸다. 그는 문득 연극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군대시절에 귀동냥을 했던 이윤택이라는 연출가를 떠올렸고, 그가 이끄는 연희단거리패에 전화를 걸어 워크숍에 참가하고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객관적으로는 무모한 선택이었다(연극인 중에는 문득 연극이 하고 싶었다거나, 연극 외에는 할 게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참 많다. 그래서 못 먹고 못 살아도 연극판을 못 떠나는 것 같다).

이윤택은 그를 신뢰한다. 그도 이윤택을 많이 존경한다. 그는 인터뷰 도중 여러 번 이윤택의 ‘어록’을 인용했다. 그 중에 대략 “처음에는 자기 연기하느라 정신이 없고, 조금 지나면 캐릭터를 고민하고, 다음엔 차례로 상대방, 관객, 세상이 보이고, 세상이 보이면 보이지 않던 더 넓은 우주가 보일 것”이라는 의미의 말도 있다.

그래서 배우 입문 후의 시간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물어봤다. 본인은 이윤택 ‘사부’가 말한 단계 중 어느 쯤 와 있다고 생각하는 지도 궁금했다.

“물론 나는 성공했다. 시작부터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뭐가 성공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때그때 할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다. 과거, 현재, 미래 구분 없이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배우로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는 시간을 통해 ‘개념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다고 했다. 역시 현학적, 사변적이지 않는가. 나는 ‘개념 해석의 자유’를 얻어 그가 말한 ‘개념으로부터의 자유’를 ‘통속적 평가로부터의 자유’라고 해석했다.

이윤택과 지현준이라는 사제지간의 깊은 교감을 단번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둘의 말은 통하는 데가 있다. 이윤택은 배우의 성숙 단계를 시계열적으로 설명했지만, 사실 우주를 본 다음에 봐야 할 것은 정해져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 배우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낮은 단계가 아니라 좀더 높은 단계에서.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윤택이 말한 ‘배우 발전론’을 평면이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처음과 끝이 붙어있는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현준이 과거, 현재, 미래 구분 없이 그저 배우로 살고 있다고 한 것과 비슷하다. 그런 내 생각을 말했더니 그는 “동의한다”며 “다 알고 계시네요”라며 공치사를 했다(그는 연장자에게 공치사도 할 줄 아는 배우다!)

그는 우리 나이로 올해 마흔이다. 그는 ‘배우는 마흔부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불혹’의 나이가 되니 뭔가 안정적인 역할을 맡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해석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아니, 정반대인 답이 돌아왔다.

“젊었을 때는 실패해도, 틀려도 바꿀 수가 있다. 그런데 40대는 보통 흘러가는 대로, 익숙한 대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나이다. 그에 따른 나쁜 결과는 60,70대에 나타날 것이다.”

‘배우는 마흔부터’라는 말은 결국 ‘배우는 마흔부터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나를 불편하게 하게 만드는 곳, 나를 모르는 곳에 놔두는 것을 즐긴다”고 했다.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늘 긴장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는 장르를 넘나드는 이유이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이유인 듯하다.

그렇다고 그가 확신을 갖고 사십 줄에 들어선 것도 아니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배우는 세상에 깊이 뿌리를 박고, 하늘을 보며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너무 어렵다. 하늘이 먼저인가, 세상이 먼저인가, 이제는 세상도 알면서 하늘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런 고민은 뿌리가 깊다. 1920년대 도쿄에 유학했던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은 신극운동단체를 만들며 토월회(土月會)라고 명명했다. 현실(土)에 발을 딛고, 이상(月)을 추구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예술의전당에 토월극장이 생긴 것도 그들의 정신과 기여를 인정한 때문이다. 이런 사연을 듣고 그는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그는 앞서 소개했듯 정기적으로 성악과 악기, 춤을 배운다. 요즘엔 프랑스어를 추가했다. 언젠가는 유럽 무대에 서고 싶기 때문이다. 9월에는 독일연수를 다녀오고, 10월에는 지난해 공연한 ‘빛의 제국’을 갖고 프랑스와 스위스로 간다. 한 해가 저물기 전에 작품을 하나 더 할 것이다.

배우로 먹고 살만한가. “먹고 살고, 새로운 것을 배울 만큼 딱 그만큼 벌고 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대답에서 다른 배우들을 봤다. 성공했다는 그가 그 정도라면 그렇지 않은 배우들은 어떨까하는 세속적인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제 오늘 들은 말도 아니지만, 내 입장에서는 배우의 입을 통해 그런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살짝 센티멘털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만약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는데 당신의 수입을 문제 삼으면 어떻게 하겠나. “내 수입을 문제 삼는 여자를 좋아할 리가 없다.”

2015년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길 떠나는 가족’은 화가 이중섭을 그린 작품으로 지현준이 이중섭 역을 맡았다. 그는 “모든 것을 조건 없이 사랑했기에 ‘미쳤다’는 말을 들었던 이중섭의 삶을 연기하며 나도 그처럼 살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국립극단 제공


인터뷰 말미에 다시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다. 배우로서의 롤 모델은 누구인가. 어떤 역을 맡고 싶나. 어떤 배우로 기억되길 원하나.

롤 모델에 대해서는 “예수는 최고의 배우”라고 했다. 신성모독이 아니라 배우 지현준이 예수에게 바치는 최고의 헌사라는 점에서 해석은 독자들에게 맡기고자 한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는 메릴 스트립을 존경한다고 했다. 그의 연기를 보면 무대와 삶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좋은 배우는 좋은 사람”이라는 컨셉에 맞는 인물이라는 뜻 같다.

맡고 싶은 역에 대해서는 인간이 아닌 역할(예를 들자면 뱀파이어)이나, 아니면 굉장히 인간적인 역할(굉장히 평범한 인물이라는 뜻)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극과 극의 역할을 얘기하는 걸 보니 지금껏 맡았던 ‘연극적인 배역들’을 한 단계 뛰어넘고 싶다는 의지로 읽힌다.

그는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배우가 되길 원한다고 했다. 나는 멋대로 그 말을 수정하고 싶다. 그와 인터뷰를 하며 나는 그가 혁명을 꿈꾸지는 않지만 매우 진지하고 학구적인 배우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도 좋지만 남이 간 길 위에 새로운 길을 내는, 그리하여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배우가 되길 원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낭만적이고 지성적인 외교관이 되길 원했다. 그는 한때 영어선생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어떤 사람도 될 수 있는 연기자의 길을 택했다. 아직도 그에게 아침상을 차려 주시는 어머니는 그의 직업에 만족하느냐고 넌지시 물어봤다. “어머니가 내가 ‘햄릿’ 하는 것을 보시고, 오래 할 수도 있으니 좋은 직업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바로 초를 쳤다. “그 말이 정말로 만족한다는 뜻으로 안다면 너무 순진한 것 아닌가.” 그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웃었다. 그렇다고 문제될 것은 하나 없다. 그는 이미 한국 연극계가 알아주는 자리에까지 올라가 있고, 더욱이 안주를 경계할 줄도 아는 품위 있는 마흔 살이 됐으니 말이다.

(그가 출연한 주요작품은 다음과 같다. 연극과 뮤지컬만 소개한다. ▽연극 ‘갈매기’ ‘햄릿’ ‘오구’ ‘꿈(카프카의 변신)’ ‘고양이의 늪’ ‘격정만리’ ‘베니스의 상인’ ‘악령’ ‘댄스 레슨’ ‘나는 나의 아내다’ ‘단테의 신곡’ ‘스테디 레인’ ‘에쿠우스’ ‘길 떠나는 가족’ ‘시련’ ‘빛의 제곡’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뮤지컬 ‘천국과 지옥’ ‘이순신’ ‘모비딕’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명동 로망스’ ‘레드 북’)

심규선 기자 ksshim@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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