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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ISSUE] 어? 대동강맥주에서 유럽의 향기가…

동아일보

입력 2012-12-08 03:00:00 수정 2012-12-09 21:04:13

북한맥주, 국산맥주와의 시음평가에서 판정승

맥주 시음은 꽤나 복잡하다. 온도가 표시되는 냉장고와 16온스 부르고뉴 잔이 있는 곳을 찾다 결국 와인학원을 빌렸다. 4일 오후 3시 서울 서초구 양재동 BWS강남와인스쿨에서 평가자로 선정된 다섯 명(왼쪽부터 왕태웅, 류강하,염행철, 크리스토프 아르놀트, 박종철 씨)이 국산 맥주 3종류와 대동강맥주를 비교 시음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최근 한국 맥주업계에 ‘북풍(北風)’이 불었다. 시작은 지난달 24일.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북한의 대동강맥주는 놀랍도록 맛있다”며 “왜 한국인들은 심심한 맥주를 마셔 대는가”라고 의문을 던졌다. 전통적인 맥주 강국 중 하나인 영국에서 나온 단호한 평가에 국내 업계는 곤혹스러워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골치가 아프다” “그런 맥주와 비교된다는 게 자존심 상한다”고 말했다.

논란에 대한 해법은 간단하다. 한번 마셔 보면 될 것 아닌가. 하지만 국내에서 대동강맥주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2007년 정식 수입이 중단된 데다 2011년 우회적인 수입경로까지 사라졌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궁금증 해소를 위해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가 현대아산의 협조로 대동강맥주 640mL 3병을 입수해 4일 시음을 진행했다. 비교 대상은 국산 맥주 3종류. 국내 맥주 제조사들의 추천과 시장점유율 등을 고려해 선정했다. 통계적으로 엄밀한 결과가 나오는 대규모 비교시음은 아니었기 때문에 국산 맥주의 이름은 영문 이니셜로 처리했다.

시음과 평가에는 염행철 한국양조과학회장, 류강하 한국마이크로브루어리협회 강사(독일 브라우 마이스터·Brau Meister·맥주 양조 기술자 자격증 소지자), 맥주 동호회원인 왕태웅(35·요리사) 박종철 씨(37·자영업), 독일인 유학생 크리스토프 아르놀트 씨(24·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가 함께했다.


네 가지 항목 중 세 가지서 1위
먼저 맥주 자체에 대한 전반적 평가(표 참조)에서는 대동강맥주의 완승이었다. 대동강맥주는 다섯 명 모두에게서 1위(25점 만점 중 평균 17.8점) 점수를 받았다. 세부 항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동강맥주는 4가지 항목 중 3가지(향, 맛, 목넘김)에서 1위였다. 특히 맛 측면에서 국산 맥주를 압도했다. 박종철 씨는 다른 맥주에는 1, 2점을 줬지만 대동강맥주에는 7점을 줬다. 그는 “국산 맥주와는 다른 독특한 맛과 향이 있다. 혀에 남는 끝 맛도 오래가서 좋다”고 평했다.

대동강맥주의 맛은 유럽 맥주의 그것에 가깝다는 평이다. 염행철 회장은 “대동강맥주가 체코에서 시작된 ‘필스너’ 맥주를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필스너는 170여 년 전 체코 플젠 지방에서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독일과 영국에서 제조법을 따라 했을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으며 전 유럽으로 확산됐다. 현재 체코산 필스너는 유럽 다른 나라 제품과 구별하기 위해 ‘필스너 우르켈’이라고 부른다. 류강하 씨는 대동강맥주가 독일 바이에른 지역의 헬레스 맥주와 비슷하다고 했다. 헬레스 맥주처럼 맥아(싹을 틔운 보리) 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는 “대동강맥주를 만든 사람들은 홉보다는 맥아 품질에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국산 맥주는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특히 우리나라 맥주 중 판매량에서 꽤 상위권에 속한다는 A맥주는 호된 비판을 받았다. 왕태웅 씨는 “맛이 없다. 형편없다는 뜻이 아니라, 맛과 향이 너무 약해서 잘 느껴지지 않는다”며 “맛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에게 ‘A맥주를 친구에게 권할 의사가 있느냐’고 묻자 의외로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왜일까. 그의 답은 “물 대신 마실 수 있어서”였다. 아르놀트 씨는 A맥주의 맛에 대해 “물에 비어믹스(커피믹스처럼 물과 섞어 맥주를 만들 수 있는 가루)를 넣은 느낌”이라고 평했다. 그는 처음에는 “썩 좋은 맛은 아니다”라며 잠시 뜸을 들이다 나중에는 “솔직히 별로(poor taste)”라고 했다.

그나마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진한 맛의 B맥주였다. B맥주는 “탄산의 느낌이 좋다” “맥아 향이 느껴져서 좋았다”는 평과 함께 2위를 차지했다. 아르놀트 씨는 “B맥주도 좋은 맥주다. 맛의 조화가 잘 이뤄져 있고 목넘김도 좋다”고 말했다. C맥주는 “쓴맛이 강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국산 맥주는 우리 음식과 잘 어울려
하지만 대동강맥주의 일방적 승리를 선언하는 건 무리다. 이어서 진행된 상황별 평가에서는 국산 맥주가 우위를 점했다. 기자는 평가자들에게 6개의 상황을 제시하고 상황별로 4가지 맥주의 선호도를 순서대로 적도록 했다. 그 결과, 국산 맥주가 5가지 항목에서 1위를 차지하며 ‘실전형’의 면모를 드러냈다. 특히 B맥주가 4개 항목에서 1위를 하며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이에 반해 대동강맥주는 한 항목에서만 1위를 했을 뿐 3개 항목에서는 꼴찌를 했다.

평가자들은 ‘한국 음식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맥주’ ‘한여름 운동을 끝낸 뒤 바로 마시고 싶은 맥주’ ‘연인이나 부부의 기념일 저녁식사에 곁들이고 싶은 맥주’로 B맥주를 첫손가락에 꼽았다. 한국 맥주로서 영예로운(?) 항목이라고 할 수 있는 ‘폭탄주 만들어 먹기 가장 좋은 맥주’에서도 1순위였다. 대동강맥주는 ‘추운 겨울 따뜻한 방에서 먹기 좋은 맥주’ 항목에서 1위에 올랐다.

평가자들은 이런 결과를 두고 “다른 나라에 비해 안주가 발달한 우리나라의 독특한 음주 문화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강한 맛의 맥주와 안주를 함께 즐기면 서로의 맛이 충돌해 역효과가 난다. 따라서 안주와 함께 마시기에는 깔끔하고 가벼운 맥주가 낫다는 것이다. 아르놀트 씨는 “B맥주는 한국의 불고기처럼 강한 음식과 잘 어울리는 술”이라고 평가했다. 맛 평가에서 ‘부동의 꼴찌’였던 A맥주가 상황 평가에서는 ‘집에서 가벼운 안주와 함께 혼자 TV를 볼 때 마시는 맥주’ 항목 1위를 차지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염 회장은 “술을 처음 접하거나 쓴맛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A맥주가 더 어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비해 대동강맥주는 자체의 맛이 강해 안주와 함께 즐기기에는 부적절하다는 평이 많았다. 아르놀트 씨는 “대동강맥주는 사실 안주 없이 먹어야 제일 좋다”고 했다.

대동강맥주의 가장 큰 문제는 품질 보증이 어렵다는 점이다. 염 회장은 “영국의 오래된 장비를 재활용하기 때문에 품질 관리가 어려워서 맛의 일관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옳았을까

맛과 향이 약하지만 우리나라 술 문화에는 맞는 국산 맥주가 영국 언론에 그렇게 비난을 받은 이유는 뭘까. 아르놀트 씨의 말에 답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한국 맥주가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나쁘지도 않다. 중요한 차이는, 유럽 사람들은 맥주를 마실 때 다른 걸 먹지 않고 맥주 자체의 맛을 즐긴다는 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한국 맥주는 심심할 수밖에 없다.”

평가자들은 국산 맥주의 가장 큰 문제로 맛보다는 다양성의 부족을 꼽았다. “외국 행사에서 ‘한국 맥주의 비전은 무엇이냐’나 ‘한국 맥주를 추천해 달라’는 질문을 받고는 ‘없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 참 아쉬웠다.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 도수가 높은 맥주, 쓴맛이 강한 맥주, 보디감(입 안에서 느끼는 무게감이나 맛의 밀도)이 높은 맥주가 다양하게 나와서 한국인만의 취향을 만들어가야 한다.”(염행철 회장)

평가자 다섯 명에게는 우리나라 맥주의 갈 길이 아직은 멀게만 느껴진 모양이었다. 이날 “오늘 시음한 맥주가 당신이 마셔본 것 중 ‘톱 10’에 들어갈 자격이 됩니까?”라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아르놀트 씨가 대동강맥주에 ‘예’라고 표시했다가 이내 볼펜으로 벅벅 지웠을 뿐이다.

▼ 맥주 제대로 맛보려면 섭씨 7~10도가 최적 ▼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다. ‘맥주를 시원하게 하고, 거품 양만 잘 조절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기자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까다로운 맥주 시음 방법을 소개한다.


가장 좋은 시음 온도는?
흔히 맥주가 가장 맛있는 온도는 섭씨 4도라고 생각하지만 시음할 때는 다르다. 시음에 적정한 온도는 섭씨 7∼10도다. 온도가 너무 낮으면 혀가 맥주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없다.


시음할 때는 식빵과 크래커를 준비하라
먼저 마신 맥주의 맛을 없애려면 생수 외에 식빵과 크래커도 필요하다. 땅콩도 괜찮다. 단 소금을 많이 넣은 자극적인 음식은 안 된다. 강한 짠맛이 맛을 느끼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기자는 시음을 앞두고 향이 없는 빵을 사기 위해 여러 제과점을 헤매야 했다.


와인 잔을 이용한다
부르고뉴 잔(잔 입구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와인 잔)을 이용하면 향(아로마)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된다. 잔에 따를 때는 맥주를 목이 넓은 유리병에 한 번 따랐다가 다시 잔에 따른다. 거품을 약간 뺀 뒤 시음을 하기 위해서다. 거품이 많으면 맛을 보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순서가 있다

한 종류의 시음이 완전히 끝난 뒤 다음 맥주를 마시는 것이 좋다. 맥주를 마신 뒤 트림을 할 때 느껴지는 맛도 평가 대상의 일부이기 때문. 또 배 속에서 두 가지 이상의 맥주가 뒤엉키면 제대로 된 평가가 어렵다. 시음 순서는 알코올 도수가 낮고 향이 약한 것부터 하는 것이 좋다. 이번 시음에서 알코올 도수가 가장 높은 대동강맥주(5.5%)를 마지막에 배치한 것도 이 때문이다.

도움말=염행철 한국양조과학회장·류강하 한국마이크로브루어리협회 강사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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