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사물존칭, 표준말 될라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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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화점서 시작된 이상한 존댓말, 사회 전체로 급속 확산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 2010년 어느 날,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이 지인들에게서 들었다며 말했다. “요즘 서비스 업종에서 그 어법이 문제인가 보던데….” 조 회장은 ‘그 어법’을 콕 집어서 이야기하며 대한항공 직원들이 고객에게 그렇게 말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롯데백화점 신헌 대표는 올해 2월 초 부임한 뒤 과도한 서비스를 깨끗하게 정리하자고 했다. 과도한 서비스 안에는 조 회장이 말했던, 그 어법이 들어 있었다.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은 올해 초 경영전략회의에서 그 어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이를 고객의 관점에서 순화할 것을 요구했다. 신세계백화점 경영진도 그 어법의 부작용에 공감하며 사원교육을 할 때 신경 쓸 것을 주문했다. 그 어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나라 기업 최초로 기업 내에 서비스아카데미를 만들었던 대한항공과 서비스가 최우선인 유명 백화점의 최고위 인사들이 입을 모아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그 어법에 대해 알아봤다. 》
○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올해 1월 29일, KBS 2TV 개그콘서트 ‘생활의 발견’ 꼭지에는 개그맨 송준근 씨가 새로 사귀는 여성으로 아나운서 이금희 씨가 등장했다. 피자집으로 설정된 무대에서 종업원이 “주문하신 피자 나오셨습니다”라고 하자 이 씨가 말했다. “피자는 물건이기 때문에 ‘나오셨습니다’가 아니라 ‘피자 나왔습니다’라고 해야 맞는 표현입니다.” 송 씨가 약간 호들갑스럽게 종업원에게 말했다. “모르셨죠? 저도 배웠어요.”

피자는 ‘나오시지’ 않고 ‘나온다’. 동사나 형용사에 붙여 존칭을 나타내는 선어말어미 ‘-시-’는 주로 사람을 높일 때 쓰인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사람이 아닌 사물에 ‘-시-’를 붙여 말하는 소리가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들린다. 서비스라면 어디에도 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대한항공과 롯데 현대 신세계백화점의 최고경영진이 불가근(不可近)으로 여기는 그 어법, 이른바 ‘백화점 높임법’ 혹은 ‘사물존칭’이다.

백화점에서 직원이 손님에게 “이 가방은 30% 세일이십니다”라고 말하거나, 커피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걸 듣는 일은 이제 웬만한 소비자에겐 꽤 익숙하다. 통신사의 콜센터 상담사는 “○○상품은 월정액 3만5000원이시고요”라고 하고, 병원에서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 수면내시경이시고요”라고 하며, 골프장에서는 캐디가 “공이 벙커에 빠지셨어요”라고 하고, 동네 식당에선 “더울 때 좋은 건 열무냉면이시고요”라고 한다. 주민센터에서도 “인지(印紙)는 400원이시고요”라고 말하는 공무원이 간혹 보인다.

백화점 매장의 판매사원이 주로 쓴다고 해서 이름 붙은 ‘백화점 높임법’은 사실 최근의 현상은 아니다. 신세계백화점 본점 남성 신사복 매장에서 14년째 근무하는 전현미 점장은 “입사 초기부터 (그 어법을) 의식했어요. 당연히 그러는 건 줄 알았지요. 은연중에, 암암리에 쓰고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199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등장한 콜센터 상담사들 중에서도 ‘사물존칭’을 쓰는 사람이 꽤 있었다고 한다.

사물을 높이라고 가르치는 교육 자료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2000년대 초반, 서비스 교육 부문에서 업계 최고의 지위를 누렸던 삼성에버랜드 서비스아카데미 박준영 차장은 “(그 시기에는) 제대로 된 경어법(敬語法)을 설명하는 고객서비스 매뉴얼 자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대한항공과 3대 백화점의 서비스 교육 담당자들도 그렇게 증언한다.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는 국내 3대 통신사인 KT, SK텔레콤, LG유플러스의 콜센터 상담사 665명에게 물어봤다. ‘사물존칭이 잘못된 문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569명(86%)이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 569명 가운데 394명(69%)이 틀린 문법인 줄 알면서도 사물존칭을 ‘가끔’ ‘거의’ ‘매번’ 쓴다고 답했다. 그러나 ‘사물존칭을 가르쳐준 사람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는 665명 중 단 5명만이 ‘있다’고 답했다. 누가 시키거나 매뉴얼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물을 높이고 있다는 뜻이다. 류미애 신세계백화점 고객서비스팀 교육총괄 대리는 “선배가 하는 걸 보고 따라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선배가 바로 ‘리얼타임 매뉴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취재 과정에서 만난 서비스 교육 관계자들이 희한하게도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있었다. 사물존칭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때가 5, 6년 전이란 점이었다. 현대백화점 고객의 소리(VOC·Voice of Customers)에 판매사원의 사물존칭이 거북하다는 의견이 처음 등장한 때는 2004년이지만 꾸준히 제기되기 시작한 시점은 2007년이었고, 신세계백화점의 VOC에도 ‘사람보다 상품에 존칭을 사용해 상품이 사람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는 것 같다’는 의견이 제시된 게 2007년 9월이었다. 콜센터 상담사부터 시작해 센터장을 거쳐 지금은 강사로 일하는, 블로그 ‘콜센터 이야기’ 운영자 최성배 씨도 2000년대 중반을 지목했다. 전현미 점장 역시 “한 손님이 인터넷에 ‘우리나라 말도 모르면서 상품만 팔려고 하느냐. 언어나 먼저 배워라’라고 글을 올린 게 5, 6년 전인 것 같다”고 했다.

2000년대 중반, 즉 5, 6년 전에 뭔가가 유통·서비스 업계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 20년 전 백화점 친절경쟁의 산물, 듣는 사람은 불편하다 ▼

○ 고객만족 시대의 부산물

현재 매장 직원들에게 고객을 대하는 자세와 방법을 가르치는 업체인 한국서비스교육센터의 강민정 전임강사는 경력 2년차다. 훤칠한 키에 호감 가는 얼굴의 20대인 강 씨는 어떤 업체 건물의 환경미화 ‘선생님들’을 교육하던 이야기를 할 때 눈빛이 빛났다. 주로 50, 60대 여성인 환경미화원들은 어린 강사에게 ‘네가 뭘 알겠어’ 하는 시선을 던졌다. “비가 오는 날 두 시간 동안 건물 현관에서 그분들하고 같이 우산 비닐을 끼워드린 적도 있고요, 매장을 찾는 고객을 위해 문만 열어드린 적도 있어요. 그래야 환경미화 선생님들하고 마음이 통해요.” 강 씨는 “떡볶이 체인점도 저희 회사의 고객”이라며 “서비스(교육)가 붐”이라고 말했다. 요즘엔 이렇게 환경미화원과 떡볶이 체인 점원들에게도 서비스 교육을 한다. 이런 서비스 최우선주의는 대체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고객만족(CS·Customer Satisfaction)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른바 CS경영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대략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다. 삼성 LG 같은 대기업에서 CS경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서비스마케팅학회 회장을 지낸 이문규 연세대 경영대 교수는 당시 CS경영이 도입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기업 간 경쟁이 심화됐고, 기술력이 향상돼 모두가 질적으로 비슷한 상품을 판매하는 상황이 된 거죠. 그럴 때 다른 기업과 차별화할 수 있는 것은 디자인과 서비스밖에 없었지요.”

1992년 대한항공이 서비스아카데미를 최초로 만들어 서비스 교육의 선풍을 일으켰고, 삼성에버랜드의 서비스아카데미가 2000년대 초 서비스 교육 업계를 주름잡으면서 CS경영이 다른 기업들로 전파됐다. 고객을 가장 가깝게 만나야 하는 백화점에서 CS경영을 그냥 지나칠 리는 없었다. 백화점들은 사내 CS조직을 신설, 확대했고 매장 협력사원에 대한 서비스 교육을 강화했다.

그러나 초기 교육 매뉴얼은 인사법, 응대예절 같은 기본적인 수준이었다. 경어법 사용 같은 내용도 어떤 면에서는 ‘원시적’이었다. 김영희 롯데백화점 경영지원부문 서비스아카데미 팀장의 말이다. “손님을 만날 때나 직장 내에서 ‘∼했습니다’라는 말과 ‘∼했어요’라는 말을 7 대 3의 비율로 사용하라는 정도였어요.”

2000년대 중반으로 가면서 백화점 업계에서는 CS가 더욱 강조됐다. 2005년 현대백화점에 입사한 백승혁 영업전략실 고객서비스팀 대리는 “당시에는 선배들이 ‘지나가던 개도 CS라고 짖는다’고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신세계백화점에서는 매장 층별로 CS관리를 담당하는 매니저가 있어서 직원들이 고객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를 모니터링했다. 판매사원들이 고객을 대할 때 부담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고객만족=고객에게 얼마나 친절한가’였다. 그들은 고객을 가장 일선에서 접하는 접점요원(Contact Personnel), 즉 판매사원의 태도가 업체의 이미지와 직결된다고 여겼다. 당연히 ‘잘해야 한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판매사원 사이에서 커져갔다. 이 과정에서 고객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높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작용했을 수 있다. 물론 기업들이 서비스마케팅을 강조한 것과 매장 직원들 사이에 사물존칭이 만연한 것 사이의 상관관계가 학문적으로 입증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짐작할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지 않을까?

소비자를 직접 대하는 종업원들 사이에서 사물존칭이 퍼지지 않았다면 VOC에 그에 대한 불만이 제기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시기에 고객의 성향이 다양해지고 서비스에 대한 기대치가 굉장히 높아졌다. 고객은 판매사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VOC를 분석해보면 인적(人的) 서비스에 관련된 것이 많아요. 그런데 한국인이 외국인에 비해 훨씬 많은 의견을 내지요.” 장현주 대한항공 인력개발원 서비스아카데미 부장의 말이다.

사물존칭 현상에 대한 불만 제기 VOC가 눈에 띄게 늘어난 시기와 백화점들이 CS에 대한 강조를 조금씩 완화하는 시기가 거의 맞물린다는 점이 재미있다. 롯데백화점은 감정노동에 매인 직원들의 심리 상태를 고려하기 시작했고, 신세계백화점은 층별 CS매니저를 없앴다. ‘CS경영 피라미드’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백화점들이 CS의 고삐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사이 CS는 요식업체, 병원, 대학, 공공기관, 그리고 일반인에게까지 전파됐다. 그와 함께 백화점 높임법도 퍼져갔다. 일종의 낙수효과(落水效果·Trickle Down Effect)가 발생했다.

○ 사물존칭과의 화해?

‘사장님이 風靡(풍미)하는 세상이다. 목욕탕이나 이발소 술집 다방에 가보면 모두가 사장님이다. 대중접객업소 종업원들은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아니고 ‘사장님’을 모신다. 이제 겨우 말단사원을 벗어났어도 “나, 사장님 아니야” 하는 사람은 드물다. (중략) 이처럼 사장님 칭호가 풍미하는 것은 칭호격상심리, 이왕이면 좋게 불러줘 선심 쓰는 미풍양속이랄 수도 있다.’(동아일보 1983년 12월 16일자)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대중의 소비가 늘어나면서 백화점을 비롯한 소매업체에서는 남자 손님이면 ‘사장님’, 여자 손님이면 ‘사모님’이라고 무조건 부르는 현상이 생겼다. 일종의 고객만족을 위한 노력인 셈이었다. 이런 호칭은 2000년대 초반에야 ‘고객님’으로 정착됐다. 그전까지는 백화점 매장에서 고객에 대한 호칭으로 사장님 사모님 아버님 어머님 선생님을 제각각 쓰고 있었다.

사물존칭 현상도 이 같은 ‘호칭 인플레’ 현상이 확대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국어학계에서 사물존칭 현상을 가장 ‘너그럽게’ 보고 있다는 평을 듣는 이정복 대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다. “1970, 80년대는 그렇게 ‘사장님’이라고 듣는 것만으로도 서비스를 잘 받았다고 내심 만족들을 했지요. 하지만 이런 호칭이 너무 보편화되고 일상적으로 되다 보니 식상해진 것 아닐까요.” 그래서 사물존칭도 따져보면 고객을 높이는 정도가 강화된 현상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이 교수는 문법의 관점에서도 백화점 높임법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시-’는 원래 주체인 사람의 행동과 상태를 높이는 경어법이다. 대개 문장에 주체가 주어로 드러난다. 그러나 문법적인 규범으로는 틀린 백화점 높임법은 주체(사람)가 문장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대화하는 상황의 맥락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를 ‘상황 주체’라고 표현했다. 대화를 할 때 그 상황을 지배하는 청자(廳者·듣는 사람, 즉 손님)를 화자(話者·말하는 사람, 즉 판매사원)가 높이려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피자가 나오셨다”고 점원이 이야기할 때 그 점원의 의도는 피자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피자를 먹는 손님을 높이는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경어법은 문장구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본다”며 “사물존칭이 발생한 사회적, 산업적 배경을 고려해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그의 주장은 국어학계에서 소수의견에 속한다. 많은 사람이 이질감과 거리감을 느끼고 불편해하는, 사물존칭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말본새를 제대로 된 교육으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여론의 주류를 이루는 것도 사실이다. 중고교 시절 허술한 국어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사회에 나와 이런 어법을 구사한다는 주장도 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서비스 교육 관계자들이 사물존칭에 대해 한결같이 이야기한 또 다른 한 가지가 있다. 이 현상이 학습이나 교육으로 바뀌기는 힘들 것 같다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 붙어버린 습관을 억지로 떼어 내기는 어렵다고 실토했다. 물론 신문에서 그런 어법을 용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고백은 살아가는 현장에서 맞부딪치는 백화점 높임법과 화해를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처럼 들렸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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