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그놈의 헌법” 계승한 “그놈의 한미 FTA”

  • Array
  • 입력 2012년 10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김순덕 논설위원
김순덕 논설위원
“앞으로 (대선후보) 토론이 본격화되면 밑천이 드러날 겁니다. 캬, 그놈의 헌법이 토론을 못하게 돼 있으니까 단념해야지요.”

2007년 6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주자의 대운하 공약을 비난하면서 한 말이다. 막말이 한두 번도 아니었지만 ‘그놈의 헌법’ 파장은 컸다. 헌법 경시를 넘어, 대한민국을 정통성 없는 나라로 여기니 헌법수호라는 대통령의 의무까지 우습게 여긴다는 국민적 분노가 들끓었다.

헌법 경시까지 노무현의 후계자

평온 속에 잊고 살았던 ‘그놈의 헌법’이 떠오른 건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그놈의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라는 발언을 해서다. 지난주 부산국제영화제 간담회에서 그는 “참여정부 때 스크린쿼터 축소가 그놈의 한미 FTA 선결 조건으로 되는 바람에 영화인들과 갈등이 있었다”며 사과했다는 보도다.

웃자고 한 말일 수 있다. 캠프에선 ‘그놈의 한미 FTA’란 말이 나왔는지 확인되지 않는다면서도 딱 잘라 부인하지 못했다. 이 발언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는 한미 FTA에 대한 시각뿐 아니라, 노무현 극복은커녕 노무현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문재인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부산 조폭을 그린 영화 ‘친구’에서 장동건이 “내가 니 시다바리가?” 했다면, 문재인은 “내는 니 시다바리다” 고백한 꼴이라면 지나친 비유일까.

헌법 경시는 노무현과 문재인의 공유의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놈의 헌법’ 발언 때 노무현이 퍼부은 야당(한나라당) 비난에 대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대통령의 선거중립 의무 위반”이라고 결정했다. 그러자 대통령비서실장이 즉각 “선관위가 표현의 자유라는 대통령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삼권분립을 뒤흔드는 이 황당한 거사에 앞장선 이가 바로 문재인이었다(헌법재판소는 2008년 1월 기각결정을 내렸다).

노무현은 취임 첫해 “측근 비리로 국민이 불신하니 재신임을 묻겠다”며 느닷없이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민정수석비서관으로서 “직선으로 선출된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은 국민투표로 하는 게 맞다”고 헌법을 해석해준 사람도 문재인이었다.

국민투표 없이도 ‘갈 데까지 간’ 노무현이 탄핵 심판대에 오른 2004년 5월 14일 문재인은 대통령의 변호인 자리에 있었다.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이 “대통령 재신임 국민투표 제안행위는 헌법 72조 위반” “선거법 폄하는 대통령의 헌법수호 의무 위반”이라고 결정문을 읽을 때 그가 속으로 가슴이라도 쳤는지 궁금하다.

그 뒤로 문재인의 헌법 경시와 자의적 해석 태도가 달라진 것 같진 않다. 달라졌다면 2005년 강정구 교수의 구속을 막은 검찰권 운용을 놓고 문재인이 “가치와 시대정신의 최종 해석권은 대통령에게 있다”고 주장했을 리 없다. 대통령의 가치와 시대정신을 대한민국 헌법정신 위에 놓는 것이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누가 ‘거꾸로 진보’ 守舊세력인가

2003년 노무현 측근비리 특검 때 문재인은 “국회의장이 특검 후보를 추천하는 것은 삼권분립 위반으로 위헌”이라며 대통령 거부권을 주도했다. 그러나 며칠 전 이명박 대통령 내곡동 사저 특검 후보를 추천한 것은 민주당이다. 국회의장도 아닌 일개 야당이 특검 후보를 추천한 데 대해 문재인은 침묵했다.

‘그놈의 한미 FTA’ 발언은 문재인이 대통령 될 경우 ‘노무현 시즌2’보다 경제적 이념적으로도 후진적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지지층 결집 같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선 자신이 비서실장일 때 타결된 한미 FTA를 놓고 “재협상으로 독소조항 제거”를 주장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스크린쿼터 문제는 노무현도 “어린아이는 보호하되 어른이 되면 다 독립하는 것 아니냐”라고 했던 사안이다. 이번 부산영화제 회고전의 주인공인 원로배우 신영균 역시 “스크린쿼터 없어지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노력했기에 한국영화가 발전했다”고 했을 정도다.

노무현 시절 청와대는 “1980년대의 낡은 종속이론으로 한미 FTA를 재단하려는 건 시대착오”라며 경제성장의 모멘텀인 한미 FTA를 통해 양극화 해소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때도 케케묵었다고 비판받았던 한미 FTA 반대론을 문재인은 뒤늦게 들먹이며 영화인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약속했다. 국민을 갓난아이로 여기고, 정부가 한없이 개입하는 시대착오적 정책을 펼 작정인 것 같다.

1980년 종속이론을 도입한 변형윤의 제자이자 노무현의 ‘실패한 이상주의자’ 이정우를 경제민주화위원장으로 영입한 걸 보면 문재인의 경제운용 방향도 불안한 느낌이 든다.

한미 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에서 활약했던 함세웅 신부는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에 대해 “박정희 독재의 제2인자로서 유신 공범자”라고 주장했다. 그래도 박근혜는 유신독재를 사과했고 변화의 몸부림을 보인다. 문재인은 거꾸로 간 노 정권의 주요 경영진이면서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고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그놈의 헌법#한미 FTA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