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 Array
  • 입력 2010년 11월 18일 20시 00분


코멘트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어제 끝났다. 수험생 학부모들의 사교육비 고통은 이어진다. 이번엔 논술 과외다. 평소 글 쓰는 훈련을 받지 않은 수험생들은 논술시험을 매우 부담스러워한다. 속성으로 논술을 가르치는 학원을 찾게 된다. 비용도 상당하다. 그러나 채점을 담당하는 교수들은 학원에서 가르쳐준 정형화된 논술 답안에는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짧은 시간 집중훈련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글을 잘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액 과외를 받아도 별 효과가 없다는 얘기다.

정보 바로 알기, 진로 교육 제공

그럼에도 수험생들이 논술학원을 찾는 것은 불안감 때문이다. 남들이 논술 과외를 받는데 내가 안 받으면 손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교육비는 이처럼 불안감에서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라는 교육시민단체가 있다. 한국의 학부모단체는 주로 정부를 상대로 목청을 높인다. 하지만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은 눈을 학부모 내부로 돌리고 있다. 사교육비는 학부모들이 잘 모르고 지출하는 일도 있으니 사교육의 실체를 정확히 알자고 주장한다. 이 단체는 ‘아깝다 학원비’라는 책자를 60만 부 만들어 배포했다. 사교육에 속지 않는 방법을 소개한 책자다. 중학교 때 학원에서 공부해 올린 성적은 고등학교 2학년 이후에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가 하면 초등학교 때 단기 유학을 다녀온 아이들이 귀국 후 한국 교육을 못 따라간다는 조사 결과도 알려준다.

또 이 단체는 맞벌이 부부가 자녀를 방과 후 여러 학원에 이른바 ‘뺑뺑이’ 돌리는 것은 스스로 공부할 기회를 박탈하는 일이라고 충고한다. 비싼 돈을 내고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것은 아직 모국어 습득조차 돼 있지 않은 나이에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고 알려준다. 학부모들이 충분히 귀 기울여 볼 가치가 있는 조언이다.

이들은 학부모에게 진로교육을 해주는 일에도 열심이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자녀에게 주문하는 직업은 극히 제한돼 있다. 의사, 변호사, 고위공무원, 대기업 직원이 되기를 바란다. 많은 학부모가 비슷한 목표 아래 무리하게 사교육비를 지출한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은 물리적으로 모든 학생이 이런 꿈을 이룰 수는 없다고 강조하면서 직업 선택의 눈을 넓힐 것을 제안한다. 전문가들을 초청해 강의를 듣고 미래에는 직업 판도가 어떻게 달라질지 지혜를 구하기도 한다.

학부모도 변화해야 줄일 수 있다


역대 정부는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현 정부도 ‘사교육과의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사교육비가 줄어들었다는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50년 이상 사교육과 싸워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정부의 무능 탓으로만 돌릴 일이 아니다. 교육 수요자인 학부모 쪽에서도 달라져야 할 것은 없는지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 학부모 쪽의 노력과 인식 변화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 점에서 신선하고 특별하다.

한두 자녀를 키우는 요즘, 학부모들은 누구나 교육에서 초보자일 수밖에 없다. 아이가 성장한 뒤 생각해 보면 다르게 키웠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아이들은 훌쩍 커 버린 이후다. 새로 아기를 낳고 기르는 부모들은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한다. 그에 따라 사교육비 지출도 늘어난다. 학부모단체들이 교육과 관련된 경험을 축적하고 공유하는 매개체 역할을 해주면 그만큼 사교육 환경이 달라질 수 있다.

사실 사교육비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줄 가능성이 높다. 내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은 66만 명이다. 이들이 선호하는 대학은 수도권에 위치한 4년제 대학과 지방 국립대학들이다. 이들 대학의 입학정원을 합하면 25만 명 정도다. 졸업생 가운데 41만 명은 여기서 탈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低)출산 현상에 따라 10년 뒤인 2020년에 고등학교 문을 나서는 학생 수는 40만 명으로 급격히 줄어든다. 졸업생 대부분이 어느 정도는 바라는 대학에 갈 수 있게 바뀌는 것이다. 상위권 대학에서 입시경쟁은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전반적으로 대입경쟁은 완화되고 사교육비 지출도 줄어들 것으로 예측된다. 그때에 이르면 지금의 사교육비 걱정과는 정반대로 학생들이 공부 안 하는 문제를 우려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한국 정서상 학부모들이 학교에 교육의 모든 것을 맡겨놓는 시대는 오지 않는다. 정부가 공교육을 강화해 사교육 수요를 근본적으로 차단해 나가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래도 사교육은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은 현실적 대안으로 사교육비 지출 가운데 학부모의 불안감에서 비롯된 불필요하고 낭비적인 비용을 최소화하자고 제안한다. 학부모가 아는 만큼 사교육비는 줄어들 수 있다는 그들의 소리에 공감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