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113>으름넝쿨꽃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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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름넝쿨꽃 ―구재기(1950∼ )

이월 스무 아흐렛날
면사무소 호적계에 들러서
꾀죄죄 때가 묻은 호적을 살펴보면
일곱 살 때 장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의
붉은 줄이 있지
돌 안에 백일해로 죽은 두 형들의 붉은 줄이 있지
다섯 누이들이 시집가서 남긴 붉은 줄이 있지
우리 동네에서 가장 많은 호적의 붉은 줄 속으로
용하게 자라서 담자색으로 피어나는 으름넝쿨꽃
지금은 어머니와 두 형들의 혼을 모아
쭉쭉 뻗어나가고
시집간 다섯 누이의 웃음 속에서
다시 뻗쳐 탱자나무숲으로 나가는 으름넝쿨꽃
오히려 칭칭 탱자나무를 감고 뻗쳐나가는
담자색 으름넝쿨꽃

 
추석은 하나지만 추석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행복한 만남, 차례와 성묘, 모처럼의 휴식일 수도 있고 일상의 연장, 박탈감의 극대화, 부침개와 설거지일 수도 있다. 상황은 천차만별이지만 모두들 알고 있다. 추석의 중심에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바로 그 가족의 이야기가 구재기 시인의 작품에 들어 있다. 이 시에서 가족사의 탐색은 호적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래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형들은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누이들은 결혼을 해서 남편의 호적으로 옮겨갔다. 머물다가 사라진 사람들에 대해서, 호적은 붉은 줄로 표시했다. 시인은 말하지 않았지만 호적의 붉은 줄들은 마치 붉은 상처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붉은 상처의 아픔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상처투성이 호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혈연의 끈을 찾아낸다. 어머니의 붉은 줄은 자식을, 형들의 붉은 줄은 아우를, 누이들의 붉은 줄은 동생을 남겼다. 이름 석 자는 삭제돼도 혈연의 강인함은 삭제되지 않았던 것이다. 시인은 핏빛 ‘으름넝쿨’로 그 강인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넝쿨은 나약한 듯하지만 갈래갈래 뻗쳐나가 결국 꽃을 피웠다. 이 시는 가족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일종의 위로 편지다. 너무 빨리 간 어머니와 형에게, 미안해하지 말라는 편지. 호적에서는 사라졌지만, 나에게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위로. 그러니 어머니와 형의 몫까지 잘 살겠다는 그런 당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시인 구재기#으름넝쿨꽃#가족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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