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비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6일 03시 00분


코멘트
라틴아메리카 작가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의 책들은 늘 손닿는 데 두고 지낸다. 비인간적인 사회정치 체제의 억압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나 통념처럼 굳어진 부당한 것들을 거부하는 인물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져 있는데, 읽다 보면 생각이 많아졌다가도 그 신선함과 상상력에 즐거워지기까지 한다. 단편 ‘느슨한 줄에서 살아가기’에서 주인공인 소년은 줄 위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저 줄이 좋기도 했지만 꼭 땅에서 살아야 할 필요를 찾지 못한 데다 다른 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그를 돌보고 교육을 맡은 선량한 퇴직 공무원은 줄과 끈을 이용해서 소년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올려 보낸다. 신문, 양초, 책 몇 권, 깨끗한 셔츠, 그리고 비누.

그런 생활용품들이 허공으로 끌어올려지는 장면을 상상하다 보면 그런 데서도 역시 비누 같은 것이 하나쯤은 필요한 모양이라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퇴직 공무원은 소년에게 말한다. “모든 피조물에게는 땅이든 하늘이든 물이든 자신만의 공간이 있다”면서 그 공간은 관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성에 따라 결정할 수도 있는 거라고. 문득, 시도해 볼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공간에서 잠시 살아보고 싶은가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물’이나 ‘바다’는 이렇게 말을 꺼내기에도 아직 큰 아픔이 남아 있으니 불가능하고, 어떤 환경운동가처럼 나무 위에서 지내보는 건 어떨까. 잠시 동안이라도 어디에 거주하든 비누나 치약은 있어야 할 것 같다. 현재 발을 꼭 붙이고 사는 관악구의 집 욕실에도 몇 개씩이나 여유분을 준비해두었듯.

이참에 비누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처음으로 찾아보았다. “때나 더러움을 씻어내는 데 쓰는 물건.” 같은 말은 석감(石검). 여기에 덧붙일 수 있는 설명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 누구나 쓸 수 있는 것, 색깔은 다양해도 거품만은 흰 것, 유용하고 향기로운 것, 만들 수 있는 것, 선물하기 좋은 것…. 이따금 값비싼 비누가 생기면 며칠 갖고 있다가 동생에게 주고는 한다. 비누라면 나한텐 이거면 되니까. 볼록한 유선형에 비둘기 로고가 새겨진 우윳빛 비누. 그게 유년 시절부터 다이알비누 살구비누 아이보리비누 등을 거치면서 찾은 취향이 되었다.

소설에서 등장인물은 그가 사용하는 소도구나 사물로 독자에게 소개되기도 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장치로 쓰이기도 한다. 아버지에 대한 소년의 불신인지 슬픔인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작가는 이런 표현을 하기도 했다. 손톱으로 아이보리비누를 긁어 다섯 개의 골을 파놓았다고. 제목도 잊어버렸지만 할퀸 듯 비누에 남아 있는 아이의 손톱자국만은 지금도 선명히 그려진다. 어쨌든 그 자국도 사라지겠지. 그러고 보면 비누에 한마디 덧붙여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이윽고 닳아 없어지는 것.
 
조경란 소설가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단편 느슨한 줄에서 살아가기#비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