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형주]빅데이터의 시대정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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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념 뒤집은 ‘자라’… 신제품 구상부터 소수의 ‘제안’아닌 다수의 ‘취향’선택
빅데이터 확산은 기술적 진보 넘어… 대중이 주체가 되는 사회변혁의 계기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세계 최대의 의류 회사는 스페인의 자라(Zara)다. 세계 88개 국가에 2100개의 매장이 있고 그중 43개는 우리나라에 있다. 최근엔 이 회사 창업자인 아만시오 오르테가가 세계 부자 순위 1위에 올랐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그래봤자 옷가게 아닌가. 숱한 옷가게 중에 자라는 왜 이렇게 성공했을까. 여러 전문가의 분석은 인스턴트 패션과 소량 다종 생산의 효율성을 이유로 든다. 이게 무슨 큰 변화라고.

 예전의 패션산업은 엘리트 디자이너의 통찰과 영감으로 주도됐다. 한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유명 디자이너가 유행할 옷의 디자인을 제시하면 그걸 대량생산해서 많이 파는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 오르테가는 이걸 뒤집어엎었다. 보통 사람들의 기호와 바람을 파악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준다는 시각으로 바꿨다. 전지전능한 지도자의 방향 제시 대신 소비자들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니, 패션 민주주의쯤 된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데자뷔). 인류 문명에서 관찰되는 엘리트주의와 민주주의의 상호 극복 과정을 닮지 않았나. 고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밝힐 권리를 가진다는 직접 민주주의를 상징하지만 이게 그리 단순하진 않아서, 엘리트주의와 민주주의자들의 대립과 갈등은 역사 곳곳에서 관찰된다. 직접 민주주의가 궤변과 혼란을 방치함을 간파한 소크라테스는 지적 소양을 가진 소수가 통치해야 한다고 믿었는데 요즘 말로 하면 엘리트주의자였던 셈이다.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플라톤은 철인정치를 얘기하면서, 철인 왕은 20세에서 30세까지 산술, 평면기하학, 입체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을 교육받아야 한다고 했다. 권력을 갖기 위한 ‘사유의 소양’을 강조한 것이다. 플라톤은 나중에 아카데미를 창립하고 철학과 기하학 연구를 하면서 엘리트들을 길러 냈는데,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복왕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 되었다.

 인구가 늘면서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해진 현대에 와서는 대의 민주주의가 이를 대체했다. 엘리트의 역할을 토대로 할 수밖에 없는 이런 구조는 정치의 영역뿐 아니라 삶의 많은 영역에서 공고해졌다. 자라는 패션의 영역에서 이걸 바꾼 것이다. 빅데이터의 활용으로 보통 사람들의 기호와 바람을 파악하는 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트렌드 분석이 끝나면 개인 디자이너의 작업이 아니라 여러 디자이너의 집단적 작업으로 신속하게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다. 철학의 변화가, 이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도구의 출현으로 구현된 것이다. 패션의 직접 민주주의 구현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빅데이터 시대의 도래는 단지 기술적 진보가 아닌 훨씬 더 큰 함의를 갖는다. 방대한 데이터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수학적 방식의 진보는 엉뚱하게도 사회적 변혁을 이끌어내는 중이다. 영웅이 이끄는 시대에서 참여 민주주의 시대로의 변화다. 사회 구성원들의 다수 견해가 변화를 이끌면서, 대중은 계도의 대상이 아니라 시대를 이끄는 주체가 되었다. 계몽주의의 그림자가 드디어 걷히는 중이다.

 자라의 성공은 미래 인재의 화두에도 시사점을 갖는다. 패션산업의 예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일자리와 스킬의 미스매치(mismatch) 문제가 분명해진다. 패션 회사에 입사한 신입 직원이 다음 시즌을 위한 디자인을 맡았다고 하자. 자신의 취향에 따른 창의적인 디자인을 제출하는 게 통상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르테가의 관점에서 이 직원은 자신의 안목을 앞세우는 영웅일 수는 있어도 회사가 바라는 인재는 아니다. 잠재 고객들이 무슨 영화를 보고 무슨 음식을 먹는지 등의 라이프스타일을 유추할 수 있는 각종 자료를 모으는 데에서 시작하는 건 어떨까. 이로부터 합리적 추론의 과정을 거쳐 패션에 관한 의미를 이끌어내서 수요자들이 원하는 디자인을 탄생시키는 사람이라면 패션 민주주의의 기수라고 할 만하다.

 미래 일자리가 요구하는 인재는 이런 문제 해결력을 갖춘 사람이지만, 실제 일자리 시장에 나오는 젊은이들은 스펙 갖추기에 ‘올인’한다. 스펙은 진짜 중요한 문제 해결력의 측정 도구로서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관련성의 정도는 점점 미미해지고 있다. 교육의 변화를 통해 이런 미스매치를 해결해야 하는 이유다.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자라#zara#빅데이터#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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