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영]딸아, 이민 가거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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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강남 화장실 살인사건 이후 많은 여성이 불안감과 분노에 사로잡혔다. 여성혐오 때문에 저지른 범죄라고 판단한 이유도 있겠지만 여성이 범죄를 유발한다고 억지 부리는 못난 남성이 적지 않게 나타났던 탓이다. 이 사회에 여성혐오 생각에 빠진 못난이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여성은 ‘언제 어디서든 당할 수 있다’는 범죄의 일상화가 두려운 판인데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모르는 여성혐오까지 신경 쓰며 살아야 할 판이다.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직장과 학교에서 생활한 뒤 병원을 찾거나 친구와 노래방에서 놀다가 귀가하는 하루 동안 여성에게 안전한 공간은 어디인가. 아침마다 아이와 남편을 문 밖에서 배웅하고 가볍게 뒷산에 오르거나 마트에서 장을 보는 평범한 주부의 일상 역시 틈새를 노린 강력 범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극히 일부라곤 하지만 교사와 의사처럼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그 신뢰를 이용해 성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평범한 뉴스가 되어 버렸다. 지하철 노래방 뒷산 마트는 흉악범이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는 주요 장소다. 배웅할 때 집에 숨어들어 주부를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완벽한 예방은 불가능하겠지만 지금처럼 물러터진 대응은 불안감을 더 키운다. 2014년 범죄 통계를 보면 강간살인, 강간상해, 친족 관계에 의한 강간, 장애인강간 등 온갖 강간은 5078건 발생해 5051건이 해결됐다. 하지만 경찰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구속 기소 의견을 낸 송치 건수는 1113건에 불과했다. 누명 쓴 사례도 있겠고 구속이 능사도 아니다. 하지만 ‘혐의 없음’(1554건)이 구속 의견보다 많다는 통계를 보니 피해자의 고통을 생각하며 수사하는 건지 의문이다. 수치심 혹은 특별한 관계 때문에 피해 여성은 제대로 진술하지 못하고, ‘동의했다’는 식의 반박에다 결정적 물증이 없어 경찰이 쉽게 손을 놓은 건 아닌지 다시 살펴봤으면 한다.

범죄 불안감만 이 땅의 딸들을 휘감고 있는 게 아니다.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으니 좀 나아지리라 믿었던 ‘유리천장’은 ‘방탄유리’가 돼 버리는 중이다. 현 정부 장관 중에선 여성가족부 강은희 장관이 유일한 여성이다. 다른 부처 모든 장관은 그 분야에서 어떤 여성보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가 보다. 유리천장 지수가 4년 연속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꼴찌라고 발표되는데도 정부가 “능력 위주의 양성평등이 실현되는 중”이라고 반박을 왜 못 하는지 모르겠다.

동아일보는 국내 20대 그룹의 여성 임원 비율이 10년 만에 2배 이상으로 늘어났다고 보도했다. 좋은 뉴스지만 두 배로 늘어 2.2%에 불과하다. 삼성은 2000명 중 58명(2.9%), 현대차그룹은 10명으로 0.9%다. 2014년 기준 페이스북은 여성 임원 비중이 25%, 트위터는 22%, 애플은 18%라고 한다.

그나마 낫다는 대기업이 이 정도이니 다른 규모의 기업이나 조직은 말할 것도 없을 듯하다. 여성이 육아를 전담해 회사에 소홀한 게 문제라면 남성도 아이를 키우게 하면 될 일이다. 1년 육아휴직 기간을 남편과 아내가 반씩 쓰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이 있다.

범죄 불안감에 더해 바늘구멍 같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으니 딸도 아빠도 속 뒤집힐 일이다. 오죽하면 “딸에게 ‘아예 이민 가 살아라’라고 말하겠다”는 아빠도 여럿 봤다. 이런저런 사정을 봤을 때 실행이 어려워 보이는 사람도 푸념하듯 이런 말을 던졌다. 그때마다 “그런 말 말아요. 좋아지고 있잖아요. 우리 딸들이 컸을 때면 살기 괜찮을 거예요”라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고개만 끄덕이고 입은 떼질 못했다.

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argus@donga.com
#강남 화장실 살인사건#여성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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