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영식]비연속성 대응 전략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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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정치부 차장
김영식 정치부 차장
전쟁을 불사하겠다던 북한의 남북 고위급 접촉 협상 제1목표는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이었다. 심지어 북한 대표단이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한국 대표단에 “우리가 어느 수준으로 해주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도대체 확성기 방송이 뭐길래. 군이 최전방 11개 지역에 송출한 방송은 그리 거창한 게 아니다. 국내외 자잘한 소식, 북한 사회 실상 등이 담겨 있다. 아이유의 ‘마음’,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 빅뱅의 ‘뱅뱅뱅’ 등 북한의 젊은 장병을 겨냥한 노래도 목록에 포함됐다. 아이유와 소녀시대, 빅뱅이 그렇게도 북한 정권에 치명적인 존재인지는 여태 몰랐다.

얼핏 보면 이런 내용의 확성기 방송에 북한이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지를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처음엔 대한민국 청년인 부사관 두 명이 크게 다친 데 대한 대응이 고작 방송이냐며 미운오리새끼 취급을 받기도 했다.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도 12일 국회에서 “합참(합동참모본부)이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고 했는데 확성기 방송 재개가 전부인가”라고 했다. 하지만 남북관계를 오래 다뤄 온 전문가들은 북한이 확성기 방송에 대응해 포격 도발을 하기 전부터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다. 북한의 행보에서 확인됐듯이 정보가 통제되고 폐쇄된 북한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대한민국에서 계속되는 소소한 일상의 여과 없는 전달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비무장지대(DMZ) 목함지뢰 도발로 시작된 군사적 위기가 해결되는 과정은 과거 남북의 군사적 대치와는 다른 모습으로 진행됐다. 이번만큼은 ‘북한의 도발-협상-보상’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는 결정이 그 바탕이었다.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결정은 북한이 준전시상태까지 선포할 정도로 확대된 이번 사태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특징적인 순간이었다.

군 수뇌부가 이번 사태의 전개 과정에서 채택한 것은 바로 ‘비연속성 대응 전략’이라고 한다.

북한은 과거에도 군사적 긴장을 연속적으로 고조시키는 압박에 나서곤 했다.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북한의 압박에 따라가며 대응하다 보면 북한의 의도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이를 끊기 위해 군 수뇌부가 워게임(War Game)을 거쳐 채택한 것이 ‘북한이 사과하지 않으면 대북 확성기 방송을 틀 것’이라고 예고하는 대신 전격적으로 방송을 재개하는 비연속성 대응이었다. 확성기 방송 예고도 검토했지만 오히려 한국 사회 내부에서 북한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반대에 부닥칠 수도 있다는 판단도 반영됐다.

이런 비연속적 성격의 태클을 건 것이 북한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예상과 다른 남측의 행보가 북한의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까지 움직이게 만들고 북한을 주어로 한 유감 표명을 하게 만들었다. 물론 확성기 방송을 예고하는 방식이었으면 위기가 크게 고조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지만, 그랬다간 지뢰 도발 사건은 흐지부지 넘어가고 북한군의 도발이 지속될 수도 있었다.

남북 고위급 접촉 타결 이후 당국 간 대화 기류가 형성되고 있지만 한반도의 위기가 모두 해소된 것은 아니다. 공동보도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황병서는 책임을 남측에 전가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위급 접촉 합의에 따라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면 대북 확성기 방송이 재개된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보면 확성기 방송의 전원 스위치를 북한군에 넘긴 것이기도 하다. 북한군이 추가로 도발하는 순간 자동으로 켜지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북한이 선택할 것은 오리발이 아니라 진정성을 갖춘 대화밖에 없다.

김영식 정치부 차장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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