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희숙]세대 전쟁이냐, 노동 개혁이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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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숙 객원논설위원 KDI재정복지정책연구부장
윤희숙 객원논설위원 KDI재정복지정책연구부장
돌이켜보건대 한국 근현대사에서 고단하지 않은 세대는 없었다. 전쟁과 가난을 겪은 세대는 말할 것도 없지만, 고속성장을 이룬 개발세대, 물질적 풍요를 맛보면서도 민주화를 갈구했던 베이비붐 세대까지, 모두 짊어진 삶의 무게가 버거웠다. 그런데도 그 시간에 대한 집단적 기억의 색깔은 열패감보다 뿌듯함이다. 경제성장과 인적자본 확대를 통해 가난과의 싸움, 전제적 잔재와의 싸움에서 우리가 이겼기 때문이다. 6·25전쟁 후 세계 최빈국에서 시작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삶이 줄곧 개선됐다는 것은 우리 역사 최대의 승리의 기억이다.

그 자랑스러운 역동성이 잦아들고 있다. 경제성장이 둔화하면서 각 부문의 상향 이동이 쇠잔해지고 있는 것이다. 원천기술력 부족, 대기업의 국제경쟁력, 중소기업 후진성, 노동시장 수요보다 교직원의 기득권 보장에 치중하는 경직적 교육, 사회의 경직성을 심화하는 복지체계 등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다시 맥을 팔딱팔딱 뛰게 할지 암중모색이다.

그런데 놓치기 쉬운 점은 이러한 변화가 세대 간 갈등 측면에서 갖는 의미다. 현재의 구조 변화는 전체가 직면한 동질적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세대 간 이질성 각도에서도 조망해야 비로소 그 입체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성장하는 사회는 좋은 일자리를 계속 창출하는 사회다. 따라서 일자리의 세대 간 배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기존 일자리는 기존 근로자로, 새 일자리는 새로 진입하는 근로자로 매칭시키면서 적당히 순환시키면 된다. 더구나 고속성장 사회에서는 노동 수요가 많기 때문에 기업마다 근로자를 오래 잡아두기 위한 장치를 활용했다. 대표적으로 연공급(年功給) 중심 임금체계는 젊을 때는 생산성보다 낮은 보수를 지급하면서 급여 인상을 훗날로 미뤄 장기근속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한번 직장이 정해지면 그것의 지속을 당연시하는 노동시장의 관행이 형성된 것이다.

반면, 경제성장이 구조적으로 둔화해 새로운 기회가 예전처럼 창출되지 못하면 앞 세대만큼의 기회가 뒤 세대에게 주어지지 않아 세대 간 격차가 벌어진다. 이에 더해 노동시장에 일찍 진입했다는 이유로 희소한 일자리를 계속 독점하는 구조라면, 뒤 세대는 질 높은 경제활동의 기회 자체가 아예 봉쇄된다.

즉, 현재 나타나고 있는 사상 최대의 청년실업이란, 성장률이 꺾인 경제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문제는 이를 최대한 완화하려면 일자리에 관한 기득권을 약화시키는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공공 부문과 대기업의 일자리를 한번 확보하면 성과에 상관없이 고용이 보장되고 임금이 근속연수에 따라 가파르게 증가하는 기득권 중심의 노동시장 제도를 허물지 않고서는 청년세대가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시장 구조개혁은 본질적으로 경제활동 기회를 세대 간에 재배분함으로써 상생을 모색하는 과제라 할 수 있다. 앞 세대고 뒤 세대고 간에 능력과 성과에 따라 고용 기회와 임금이 조정되는 시장으로 전환해야 한다. 전반적인 기회가 줄었으니, 이를 공정하게 배분하는 규칙과 기준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자원이 보다 유연하게 이동해야 전체 파이도 키울 수 있다.

그런데도 현재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논쟁을 보면 갑갑하다. 정년이 2∼3년 연장된다고 해서 뭐 그리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임금까지 깎느냐는 것이다. 자녀들이 쑥쑥 제 살길 찾아 취업하는 것도 아니니 나이 들어도 쓰임새는 여전하고 고령화 속에서 노후 보장도 깜깜하니 중장년 몫을 뺏어 청년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는 항변에 마음이 먹먹하다.

그러나 성장 둔화로 인한 고통을 세대 간에 나눠야 한다는 점을 외면할 수는 없다. 연장된 근로연수 동안의 임금 조정을 통해 청년고용 감소를 최소화한다는 임금피크제는 노동시장의 기회를 세대 간에 재배분하는 시도 중 가장 초보적인 첫걸음이다. 이것도 정착시키지 못한다면, 고용의 기회와 임금, 업무 배치 등의 유연성을 높여 세대 간 격차를 줄이는 일련의 개혁은 그야말로 요원하다.

임금피크제가, 그리고 이를 포함한 노동시장 개혁 과제가 한국 경제에서 갖는 의미는 역사성 속에서 규명돼야 한다. 유례없는 고성장의 시대가 저성장과 고령화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고통이 없을 수 있을까. 그 전환기의 고통을 각 세대가 분담하고 전체 파이를 키워내기 위한 규칙의 재편이 바로 노동시장 구조개혁이다.

윤희숙 객원논설위원 KDI재정복지정책연구부장
#세대 전쟁#노동 개혁#노동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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