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신영]은유로서의 질병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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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사람은 추상화를 잘하는 만큼 구체화도 잘하는 존재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이나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상일 때 특히 그렇다. 구체화는 주로 익숙한 물체나 사람을 이용해 대상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일종의 알레고리 혹은 은유다.

추상을 구체화한 대표적인 사례는 질병이다. 요즘은 광학기술과 미생물학이 발달해 질병의 원인이 되는 병원체의 모습을 눈으로도 생생히 확인하는 시대다. 세균은 물론이고 에볼라나 메르스 바이러스처럼 크기가 극히 작은 대상도 전자현미경으로 또렷이 포착한다. 하지만 불과 200년 전만 해도 불가능했던 일이다. 보기는커녕 존재도 몰랐다. 1840년대에 영국의 역학자 윌리엄 파는 콜레라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런던의 평균 기온과 사망자 수 사이의 관계를 구했다. 콜레라가 나쁜 기운(오염된 공기) 때문에 걸린다고 생각하고 기온에 따른 템스 강의 수분 증발량과 관련을 지어 보려 한 것이다.

이렇게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병은 은유가 될 강력한 압력 아래에 있었다. 미국의 평론가 수전 손태그는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난치병은 곧잘 신학적인 은유를 띤다고 지적했다. 병은 사람에 대한 신의 응징이거나 인류를 향해 진군하는 악이었다. 대상이 악이면 사람으로선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일본의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병과 싸운다’는 것은 병이 마치 작용하는 주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말투”라고 지적했다(‘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 질병은 추상이었는데 마치 뭔가 구체적인 존재처럼 취급되게 됐다. 이 지적은 지금도 유효해서 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각종 뉴스에서 메르스와 맞서 싸우는 내용의 기사를 수도 없이 봤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병원체가 발견됐다. 질병이 처음으로 구체적인 대상으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은유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병원체가 ‘미지의 악’ 자리를 꿰어 찼을 뿐이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병이 아니라 병원체가 인간을 향해 싸움을 거는 존재가 됐다. 문제는 병원체에 대한 이런 관점이 현대 의학과 과학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원인(병원체) 한 가지에 모든 악을 뒤집어씌운 채 다른 요인에 대해서는 뒷짐을 지게 만들 수 있어서다. 병은 병원체 혼자서 일으키는 게 아니다. 방역체계가 무너지고 역학 전문가가 부족하며 병원체에 대한 기초 연구도 이뤄지지 않은 현실이 어우러져서 유행한다. 병원체에 대한 과도한 은유는 이런 사실을 잘 드러나지 않게 할 수 있다.

수사적인 은유보다는 병원체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 물론 그 목적이 병원체 자체를 때려잡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이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병원체의 전파 특성을 알고 선호하는 주변 환경을 파악해 병의 유행을 차단해야 한다. 19세기의 콜레라는 콜레라균을 잡아 없애서가 아니라 전파원인 우물을 관리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다.

1930년대에 태어난 손태그의 시대에 대표적인 난치병은 결핵과 암이었다. 오늘날 결핵은 이전보다는 많이 사라졌고 암이 질병계의 ‘은유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에볼라와 메르스가 창궐한 최근에는 감염병이 그 자리를 꿰어 찰 기세다. 그런데 요즘 결핵이 다시 심상치 않다. 항생제라는 무기로 결핵균을 ‘격퇴’했더니 균이 항생제에 대한 내성으로 무장해 다시 돌아왔다. 다른 항생제를 썼더니 아예 여러 항생제에 견디는 다제내성균이 됐다. 속편마다 강해져서 돌아오는 터미네이터도 아니고 왜 이러는 걸까. 질병에 대한 ‘무력’ 경쟁은 옳지 않다는 은근한 은유가 아닐까.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ashilla@donga.com
#추상#은유#질병#메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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