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유영]노트북 지하철 표류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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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 소비자경제부 기자
김유영 소비자경제부 기자
아뿔싸.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본능적으로 가방부터 살폈다. 가방이 유난히 가벼웠기 때문이었다.

가방은 열려 있었다. 책들은 그대로 있었지만, 노트북만 없었다. 지하철은 이미 떠난 뒤. 수만 장의 사진과 자료도 노트북과 함께 사라졌다. 지하철 선반 위에 노트북 가방을 올려놓고, 휴대전화에 고개를 푹 박고 있던 내 잘못이었다.

분실이든 도난이든 일단 파출소로 향했다. 경찰은 “도난이라면 노트북이 인터넷 중고 게시판에 매물로 나올 수 있으니 틈틈이 살펴보라”고 했다. 또 습득한 물건을 게시하는 경찰청과 지하철의 홈페이지 주소를 메모지에 또박또박 써서 건네줬다.

경찰이 알려준 대로 인터넷의 중고 물품 거래 게시판을 확인했지만, 내 노트북은 없었다. 잃어버린 것과 같은 모델의 노트북은 20만∼30만 원에 거래되고 있었다. 새 노트북보다는 싸지만,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냥 주웠더라도 쉽게 현금화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군가 노트북을 가져갔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노트북 찾는 것을 거의 포기할 무렵, 지하철 분실물 센터 홈페이지를 살펴보다가 잃어버린 노트북과 비슷한 제품의 사진을 발견했다. 전화로 확인하니 내 노트북이 맞았다.

노트북이 발견된 곳은 회사와 반대 방향의 종착역이었다. 지하철은 서울을 관통해 경기도까지 갔다가 다시 서울로 진입해 종착역에 이른 것이었다. 승객이 모두 내린 뒤 객실을 점검하던 직원이 노트북을 발견했다. 지하철이 왕복 150km를 오가는 동안 수백 명의 승객이 노트북을 봤겠지만,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

고마운 마음으로 빵을 사들고 한달음에 종착역에 가니 역무원들은 “물건을 되찾아주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한사코 사양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실제로 해외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대한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미국의 월간지인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50달러가 든 지갑 200개를 유럽 전역에 뿌렸는데 이 중 58%가 회수됐다. 특히 소득 수준이 높은 북유럽에서는 회수율이 70% 이상이나 됐다. 이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힘이었다. 사회적 자본이란 사회 구성원들이 힘을 합쳐 공동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제도나 규범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사회적 자본의 핵심은 신뢰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정해진 규칙을 잘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다. 사회적 자본이 잘 확충된 국가일수록 각종 사회적 비용이 적고 경쟁력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15시간 동안 주인을 찾아 지하철을 표류했던 노트북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올 한 해 동안 세월호 참사를 필두로 무수히 많은 사고가 있었다. 원칙을 지키지 않은 그들에게 우리는 분노했다. 하지만 손 글씨로 또박또박 메모를 써서 안내해준 경찰, 감사 사례조차 받지 않던 역무원, 물건을 보고도 그대로 놓아둔 시민 등 ‘수많은 무명씨’들 덕에 우리 사회가 아직은 절망할 수준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늦은 저녁, 역무원에게 건네주지 못한 빵을 먹으면서 안도감을 느꼈다. 빵이 들어간 배 안에서 따스한 기운이 맴돌았다.

김유영 소비자경제부 기자 abc@donga.com
#노트북#도난#분실#사회적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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