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칼럼]‘어차피’에서 ‘그래도’의 세상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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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수능 세계지리 오류…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수습과정은 평가할 대목도
‘어차피’ 대법까지 가도 될 걸… 잘못 인정하고 상고 포기
‘그래도’ 지금 바로잡는 게 낫겠다는 선택에 주목한다
국가는 힘들고, 귀찮고, 욕먹어도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교훈 얻어야

심규선 대기자
심규선 대기자
수능의 수난이다. 지난해 수능의 세계지리 8번 문항을 모두 정답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끝났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것이다. 올해도 영어와 생명과학Ⅱ에서 출제오류 논란이 벌어지면서 수능은 만신창이가 됐다. 우리 국민은 전원이 교육분석가와 정치평론가의 자격증을 갖고 있다. 인생을 좌우하는 대학입학이, 대학입학을 좌우하는 수능이 관심의 사각지대로 들어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올해의 논란이 어떻게 정리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런데 지난해 세계지리의 오류는 이미 수습 시나리오가 발표됐다. 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해 피해 수험생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조치라는 시각이 결여됐다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우리는 그동안 피해 수험생과 소송까지 벌여온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뻔뻔함과 감독을 소홀히 한 교육부의 무능을 질타했다.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책을 제시하고, 책임자의 처벌도 촉구했다. 당연하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이런 문제의식은 문제유발자들만을 문제 삼고 있다.

우리는 왜 수능 오류를 질타하는가. 출제기관과 감독관청, 관련자들을 비판하는 게 목적이 아님은 분명하다. 단 한 명의 수험생이라도 부당하게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정의’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지리의 오류를 수습하는 과정은 달리 볼 대목이 있다.

평가원과 교육부가 서울고등법원의 ‘정답 없음’ 판결을 수용해 상고를 포기한 것은 늦었다고 꾸짖는 동시에, 더 늦지 않은 점은 평가해야 한다. 대법원 판결까지 기다렸다면 더 큰 혼란이 벌어졌을 것이다. 정부기관은 모두가 책임지는 시스템이어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귀찮은 일일수록 폭탄 돌리기를 한다. 그런데 이번에 그 관행을 끊었다. 외적 강제가 오기 전에 전임자의 잘못을 후임자가 바로잡겠다고 나선 것은 변화라면 변화다. 그런 변화는 권장돼야 마땅하다.

지난한 수습 과정과 또 다른 논란을 각오했다는 점도 그렇다. 당국은 점수를 재산정하고, 특별법을 만들어야 하며, 구제가 불가능한 하향지원 학생들의 소송에 응해야 한다. 대학들은 먼지가 쌓인 서류를 꺼내 재사정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도 아니다. 공무원이라면 피하고 싶은 일들뿐이다.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줘도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공무원을 크게 칭찬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번 일은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어떤 각오와 희생이 필요한지에 대한 좋은 선례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교육과 교육행정은 너무 중요하기에 너무나 변하지 않는다. 너무 많은 관심을 받기에 너무나 무덤덤하다. 너무 요구가 많기에 너무나 많은 것을 무시한다. 너무 고칠 것이 많기에 너무나 많은 것을 방치한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견인차라던 교육이 지금은 오히려 짐이 되어버렸다. 그런 교육, 그런 교육행정이기에 세계지리 오류의 수습 방식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싶은 것이다. 짜게나마 인정할 것은 인정해줘야 부정하고, 감추고, 깔아뭉개는 일이 줄어들 것 같아서다.

교육당국은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됐을까. 바뀐 세상이 영향을 줬다고 믿는다. 우리는 요즘 ‘어차피’에서 ‘그래도’의 세상으로 옮겨가고 있다.

어차피 대법원 판결이 나올 텐데, 어차피 시험은 끝났는데,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킬 해법은 없는데…. 그 수많은 ‘어차피들’ 속에는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고, 어차피 적당한 선에서 해결될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달라졌다. 그래도 한 번은 외쳐보고 싶고, 그래도 제3자의 판단을 받아보고 싶고, 그래도 잘못한 만큼만 책임을 지고 싶다, 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런 변화의 언저리에 평가원과 교육부의 이번 선택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능 세계지리 문항의 수습은, 그래서 두 가지 잣대로 평가해야 한다.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피해 수험생을 한 명이라도 더 구제하는 일이 우선이다.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주저 없이 공급자인 출제자가 아니라 수요자인 수험생의 입장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원칙은 교육 분야뿐 아니라 모든 행정 분야에서 기능해야 한다. 그것이 세계지리 문항의 수습 과정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다. 아무리 귀찮고, 힘들고, 욕을 먹더라도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그래서 기자는 지금, 수북이 쌓인 비판의 낙엽 위에 서서 내년 봄의 새싹을 기다린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수능#세계지리#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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