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의 ‘직필직론’]유엔 사무총장과 대통령이라는 자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30일 03시 00분


코멘트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 정치의 중심인물이 됐다. 지금 한국에 있지도 않은 그는 현실 정치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한 번이라도 정치를 하겠다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친 적이 없다.

○ 곤혹스러운 정치상황 드러낸 ‘반기문 현상’

그런 반 총장이 3년이나 남은 차기 대선과 관련한 후보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로 꼽힌다. 오랜 세월 대통령 병에 걸렸다는 소리까지 들으며 국민들 눈에 들기 위해 몸부림쳐 온 이른바 ‘잠룡(潛龍)’들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단순히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자리를 감싸는 아우라에 압도당한 것일까. 아니면 고만고만한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이 마땅치 않은 탓일까. 어찌됐든 인물난에 허덕이는 곤혹스러운 한국의 정치 상황이 ‘반기문 현상’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흔히들 세상에서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가 가장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열강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에다 남북이 갈라진 상황은 말할 것도 없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온갖 분열로 극심한 갈등과 충돌이 날마다 벌어지는 나라이니 웬만해서는 대통령이 까다로운 국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음을 빗댄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의 중재자’라 불린다. “외교관이며 공무원인 동시에 최고경영자”라고도 한다. 국민들은 국회의원 한 번 한 적이 없더라도, 세계의 분쟁을 조정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있는 반 총장이 대통령이 되면 잘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높은 지지를 보낼 것이다. 그런 점을 노려 여야 모두 오래전부터 그를 영입하려고 물밑 작업을 벌여왔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지금 여야 일각에서 검토한다는 오스트리아 식 이원집정부제 개헌론도 반 총장을 염두에 둔 계산이라는 것. 외치 경험이 많은 반 총장이 대통령 후보를, 다른 대선주자가 총리 후보를 맡는다는 각본이다. 반 총장 개인의 정치 소신, 정치 역량을 떠나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자리가 한국 정치에 주는 매력과 영향력은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유엔 사무총장’과 현실 정치의 함수 관계를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유엔 사무총장 직을 떠나 대통령이 된 사람도 있지만 유엔에서 일하기 위해 대통령 자리를 던진 사람도 있다. 그래서 유엔 사무총장이란 이름과 이미지만으로 마땅히 반 총장이 대선 후보가 돼야 한다고 국민들이 판단하거나 정치권이 계산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라는 의문이 든다.

4대 유엔 사무총장 쿠르트 발트하임은 정치권이 반 총장을 영입하기 위한 명분적 존재이다. 반 총장을 이원집정부제의 대통령, 제2의 발트하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반 총장처럼 오스트리아의 외교장관 등을 지낸 직업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반 총장과는 달리 현실 정치에 대한 집착이 컸다. 그는 1971년 대선에 출마했으나 패배했다. 이듬해 유엔 사무총장이 됐으나 1981년 중국의 거부권 행사로 사무총장 3선 도전이 좌절되자 빈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1986년 두 번째 도전 끝에 대통령이 됐다. 선거 직전 불거진, 2차 세계대전 때의 나치 전력 시비에 대한 후유증 탓인지 발트하임은 대통령 재임 중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역대 어느 대통령도 실패한 적이 없는 재선을 발트하임은 포기하고 말았다.

○ 대통령직 버리고 유엔 선택한 로빈슨

그와는 달리 메리 로빈슨 아일랜드 대통령은 1997년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이 되기 위해 자진 사임했다. 그를 ‘스카우트’했던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인권고등판무관 자리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자리가 아니다. 많은 정부에서 성가신 존재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러나 로빈슨 대통령은 “이도저도 아닌 정체불명의 자리라는 외부 평가를 안다”면서도 인권고등판무관이 되기 위해 임기 종료 2개월 전 대통령을 그만두었다. 따 놓은 당상인 재선도 마다했다. 460만 명의 국민이 있는 나라 대통령이 겨우 150명의 직원이 있을 뿐인 유엔 산하 조직의 수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한국인의 정치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가.

아일랜드에서는 1990년대를 ‘로빈슨 시대’라고 부른다. 경제 발전과 함께 통합의 정치를 실현한 첫 여성 대통령 로빈슨에게 보내는 지극한 헌사이다. 그는 의원내각제 대통령의 한계를 ‘도덕적 권위’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의 수치라 불리던 ‘슬픈 아일랜드’를 유럽에서 가장 잘사는 아일랜드로 만든 기적의 대통령이었다. 그의 절절한 호소가 국민들을 분발케 했고, 전 세계 아일랜드 사람들을 모국에 투자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기적이었다. 그는 임기 중반 93%의 절대적 지지를 얻었다. 로빈슨은 인권 변호사, 상원의원으로 평생 품어온 자신의 신념과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대통령 자리도 마다하고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을 택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아일랜드를 훨씬 뛰어넘은 세계의 인물이 됐다. 2013년, 2014년 반기문 사무총장은 로빈슨 전 대통령을 아프리카 평화협상 특사, 기후변화 특사로 각각 임명했다.

반 총장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알 수 없다. 발트하임이나 로빈슨의 결정을 잘 참고하라고 반 총장에게 권하고 싶다. 무엇보다 반 총장이 대선 후보가 되기를 기대하는 국민들이나 정치권 모두에게 로빈슨 전 대통령의 존재를 상기시켜 주고 싶다. 대통령보다 더 가치 있는 자리를 위한 그의 결단 때문이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반기문#유엔 사무총장#대통령 후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