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광표]자기소개서 유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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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표 정책사회부장
이광표 정책사회부장
1. 고등학교 재학기간 중 학업에 기울인 노력과 학습 경험에 대해 배우고 느낀 점을 중심으로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2. 고등학교 재학기간 중 본인이 의미를 두고 노력했던 교내 활동을 배우고 느낀 점을 중심으로 3개 이내로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 교외 활동 중 학교장의 허락을 받고 참여한 활동은 포함됩니다.

3. 학교 생활 중 배려, 나눔, 갈등 관리를 실천한 사례를 들고,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느낀 점을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곧 내년도 대입 수시모집이 시작된다. 그 가운데 종합전형(정원 5만9000여 명)에 응시하는 수험생은 대부분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야 한다. 자기소개서의 서술 항목은 위에 소개한 세 가지로 지정되어 있다.

응시 학생들은 요즘 담임교사, 상담교사, 국어교사나 부모 친척 등의 도움을 받아 자기소개서의 방향을 정하고 내용을 첨삭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 자신을 전략적으로 과장하거나 포장한다. 어쩔 수 없다는 의견, 모든 수험생이 마찬가지이기에 별 문제가 없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순수하지 않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솔직한 글이 좋은 글이라고 배워왔는데 말이다.

서술 항목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이 항목을 벗어나 자기소개서를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1번 항목을 뒤집어 보면 이러하다. 학습 경험에 대해 특별한 느낌을 갖고 있어야 한다. 별다른 느낌 없이, 그냥 열심히만 공부하면 안 된다.

2, 3번의 경우 솔직히 말하면 스펙 관리다. 학생들은 배려와 나눔 항목을 채우기 위해 동아리를 만들고 어딘가에 가서 봉사활동을 한다. 그러곤 그 배려와 나눔의 감동과 보람을 자신의 전공선택과 연결시켰다고 서술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들이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만들어진 봉사와 배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갈등 관리는 더 어려운 데다 이에 대한 자기소개가 대학입시에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자기소개서의 서술 항목을 뜯어보면 은근히 가시적인 결과를 요구한다. 교내 활동을 덜 하고 혼자서 책을 보고 생각하며 지낸 아이들, 별 생각 없이 지내다 고3이 되어 뒤늦게 희망 전공학과를 선택한 아이들은 자기소개서를 쓰기 위해 엄청난 첨삭을 해야 할 판이다.

지난해 말 입시철에 발간한 교육전문지 ‘오늘의 교육’(2013년 11·12월호)에서 한 교사의 글을 읽었다. 자기소개서 첨삭지도를 받던 한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저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좀 이상해서 힘들었어요. 봉사활동 한 것을 ‘배려와 나눔’으로 쓰는 것도 그렇고, 학급 회장을 한 것을 리더십이라고 쓰는 것도 그렇고요. 그냥 수능으로 대학 가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돼요. 다른 대학의 자기소개서는 그냥 제 힘으로 해보겠습니다”라고. 그러자 교사는 학생에게 이렇게 속으로 답했다. “소개서를 첨삭받는 것 자체에 대해 의구심이 생기는가 보구나, 그래 너를 응원한다. 너의 회의(懷疑)를 응원한다”고.

문득 18세기 말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런던’이 생각났다. 여기 ‘나는 가까이 법제화된 템스 강(the chartered Thames)이 흐르는/모든 법제화된 거리를 헤매며’라는 대목이 있다. ‘법제화된 템스 강’을 통해 산업화로 인한 인간 소외를 통찰한 것이다. 강물이 법제화되어 흐르다니, 우리네 자기소개서 역시 법제화되어 가는 것 아닌지. 서술 항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이광표 정책사회부장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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