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현두]인간에 대한 배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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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두 스포츠부 차장
이현두 스포츠부 차장
그때도 그랬다.

모두가 안타까워했고 분노했었다. 정부는 우왕좌왕했고, 정치인들은 무기력했었다. 그러고는 사고 책임자를 가려내 엄벌에 처하겠다고, 시스템을 새롭게 정비하겠다고, 최상의 매뉴얼을 만들겠다고, 완벽한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온갖 부산을 떨었다.

그래서 그때는 바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헛된 기대였다는 것을 아는 데는 2년도 채 안 걸렸다. 1993년 292명의 생명을 앗아간 위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현장에서 취재 기자로 느꼈던 참담함과 분노가 1년 6개월 뒤 101명의 목숨을 빼앗아 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현장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번에도 돌아가는 모양새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검찰과 경찰은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을 구속하고, 안전 매뉴얼을 지키지 않은 관련자는 모두 사법처리하겠다고 한다. 정부는 안전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점검하고, 매뉴얼도 보완하겠다고 한다.

굳이 외국 언론의 지적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정말 20년 동안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똑같은 사고에 똑같은 대응이다. 그러다 보니 이번에도 정부가 내놓을 대책에 큰 기대가 가지 않는다.

사실 시스템과 매뉴얼이 미흡해서 사고가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본보가 지적했듯이 대책과 매뉴얼이 서랍 속에서만 뒹굴고 있다는 것이다(21일자 A12면 참조). 이번 사고 역시 기본적인 매뉴얼조차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매뉴얼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감독해야 하는 사람이나 모두 ‘설마 큰 사고야 나겠어’라는 생각에 매뉴얼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승객이 자신들의 가족이었어도 그렇게 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두 번 세 번, 매뉴얼에 없는 것까지 점검했을 것이다. ‘내 몸, 내 가족’처럼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인간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이야말로 후진국형 대형 안전사고가 계속 반복되는 근본 원인일 것이다.

이번 사고를 지켜보면서 10여 년 전 항공사고 전문가로 불린 정부 관계자에게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제주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조종하도록 돼 있었던 조종사가 아침에 호텔에서 눈을 뜬 뒤 자신의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유럽 출신인 이 조종사는 즉각 항공사에 전화를 해 “오늘 몸이 안 좋아 비행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항공사 담당자는 “어젯밤 혹시 술을 마셨느냐, 아니면 감기에 걸렸느냐”고 물었고 조종사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감기에도 걸리지 않았는데 컨디션이 너무 안 좋다”고 대답했다. 당장 항공사 담당자는 “그럼 뭐가 문제냐. 조종을 하라”며 전화를 끊었고, 다음 날 조종사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당시 항공사 담당자에게는 승객의 안전은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사고 직후 승객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친 세월호 선장도 마찬가지다. 이번 사고 직후 “내가 선장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떳떳하게 말하는 사람을 보면 여전히 우리는 미필적 고의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부처 간 책임 떠넘기기, 실종자 명단 앞에서 기념사진 찍기 등 정부 관계자들의 연이은 헛발질 역시 유가족을 내 가족처럼 여겼다면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들이다. 17년 전 대한항공기 괌 추락 사고 당시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는 사고 직후부터 유가족들에게 사고 현장에서 들어오는 구호 소식과 사고 조사 과정 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는 직원을 유가족 대기실에 상주시켰다. 구조 관련 속보는 유가족에게 가장 먼저 전달됐다. 인간에 대한 배려가 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이현두 스포츠부 차장 ruch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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