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지은]침착하게기다리면죽는다… 한국식 재난대처법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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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사회평론가
정지은 사회평론가
차라리 천재지변이면 낫겠다. 무심한 하늘이라도 실컷 원망할 수 있게 말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분노가 치민다. 어디를,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르게 화가 나고 뒤숭숭하다. 사고 자체도 비극이지만, 사고 그 이후의 과정은 더욱 심란하다.

첫날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배는 바다에 떠 있었다. 워낙 큰 배이기도 했고, 구조됐다고 하니 별일 아닌 줄 알았다. 한밤중도 아니고 환하디환한 대낮이었는데 그동안 대체 뭘 한 걸까? 조난 신호를 보낸 후 선체가 전복되기 전까지 90분 넘게 바다 위에 떠 있었는데도 배를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뉴스를 보면 볼수록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밖에 안 나온다. 사고 발생부터 탈출, 구조 과정과 이후 수습까지 그야말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탑승 인원만 해도 그렇다. 배를 탈 때는 아무리 가까운 거리를 가더라도 승선권에 이름, 주민번호, 연락처를 적게 되어 있고, 탑승 시 이 승선권과 신분증을 대조, 확인하게 되어 있다. 분명 절차가 있으니 지키기만 했다면 몇 명이 탔는지를 놓고 오락가락할 여지가 전혀 없는 사안이다. 누가 탔는지, 몇 명이 탔는지도 모르는 채 국내에서 가장 큰 여객선이 그 먼 거리를 운항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정상이다.

하지만 이런 비정상은 어찌 보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여행사 등이 70% 할인된 백령도행 여객선 배표를 조직적으로 싹쓸이해 이를 산 관광객들이 타인 명의로 된 할인 표로 버젓이 배를 타던 게 바로 지난해다. 심지어 선내에 비치된 구명조끼가 승객 수보다 적고, 구명보트도 제대로 펴진 게 없는데도 세월호는 두 달 전 정기 선박 검사를 통과했다.

정기 검사를 해야 한다는 절차도 이런 사고 후에 만들어졌으리라.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매뉴얼과 절차가 있어도 지키지 않는 관행이 비단 이 해운업계뿐일까. 사회 곳곳이 이런 지뢰밭으로 가득할지 모른다. ‘그런 거 다 지켜가면서 살면 못 산다, 적당히 하면 되지 뭘 그렇게까지 따지고 드느냐, 관행이니 하던 대로 하면 된다.’ 사회생활 하다 보면 한두 번 듣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만약 단체 여행객이 탄 배의 출항이 늦어졌는데 전체 인원 점검을 하려는 선원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바쁜데 빨리 가자”부터 “사정 다 알면서 사람이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냐”는 비난이 쏟아졌을 것이다,

특히 업종을 막론하고 안전 관련 업무 종사자는 찬밥 신세다. 그게 뭐 하는 일이 있냐고 대놓고 면박 주는 사람도 있고, 그 업무들조차 외주화된 지 오래다. 규제 완화가 대세인 터에 그나마 있던 안전 관련 규제들도 완화되거나 없어질 판이다. 대형 사고가 터졌으니 한동안 또 특별점검이니 뭐니 난리법석을 떨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전은 또 귀찮고 돈 들어가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되돌아갈 것이다.

얼마 전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이미 잊혀지고 있지 않은가. 학생들이 투신자살한다고 창문을 못 열게 만들고, 건물이 붕괴되니까 대학 오리엔테이션(OT)을 못 가게 하고, 인턴 성추행 사건이 터지니까 여자 인턴을 안 뽑고, 여객선이 침몰하니까 수학여행을 보류한다. 이런 걸 대책이라고 내놓고 우리는 열심히 화내고 욕하다가 또 잊을 것이다.

이 사건은 앞으로 누가 어떤 말을 하든 본능에 따라 행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뼈저린 교훈을 다시 한 번 남겼다. 오죽하면 ‘사고 발생 시 관리자의 지시와 통제를 절대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침착하게 행동해서 때늦을 거라면 혼란이 가중되더라도 더 빨리 움직이는 게 낫다’ 등의 내용을 담은 ‘새 대한민국 재난 응급 대처법’이 나왔을까.

위험 대처 시스템이 20년 전과 똑같은 수준이라면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뛰어온 것일까. 생때같은 어린 목숨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뻔히 보고만 있어야 하다니…. 다시는 누구도 이런 죽음을 맞아서는 안 된다. 세상이 이러면 안 된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한 명이라도 더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정지은 사회평론가
#사고 발생#탈출#구조 과정#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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