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이면 자살, 오른쪽이면…”, 김지하 점을 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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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17>자살생각

7년 반 만에 대학을 졸업하지만 김지하에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다. 잦은 통음과 내면적 허무로 몸이 망가져 폐결핵에 걸린 것. 사진은 2년 반이나 요양했던 서대문 시립병원에서 문병 갔던 친구가 찍은 것. 김지하 제공
7년 반 만에 대학을 졸업하지만 김지하에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다. 잦은 통음과 내면적 허무로 몸이 망가져 폐결핵에 걸린 것. 사진은 2년 반이나 요양했던 서대문 시립병원에서 문병 갔던 친구가 찍은 것. 김지하 제공
1965년 9월 4일 고려대 연세대에 무기한 휴업령이 내려진 날이었다. 김중태 최혜성 박재일 이숭용 진치남 송철원 등 6명은 중앙정보부 서울분실로 끌려가 젖은 멍석에 둘둘 말려 야구방망이로 매타작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곧 내란음모 및 선동, 반공법 위반 등으로 구속 기소된다. 김지하는 시골에 내려가 있었다. 전국에 김지하 수배령이 떨어졌다.

경찰은 김지하의 친척, 친구 등 그와 연관 있는 모든 곳, 모든 사람들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그의 모친을 지프차에 태워 앞세우고 다니며 아들의 행방을 대라고 하기도 했다. 김지하의 말이다.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졌다고 하길래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을 했다. 한번은 서울 성북구 장위동 작은 이모네 골방에 숨어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정보부원들이 들이닥쳤다. 나는 캐비닛 안에 숨어 있다가 겨우 살았다. 나중에 정보부원들이 그 사실을 알아챈 바람에 작은 이모만 혼이 났다. 더 기가 막혔던 것은 부모님이 겪었던 고초였다. 정보부가 아버지를 잡아다 ‘아들 놈 숨은 곳을 대라’고 전기고문을 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졸도하고 고혈압이 터져 반병신이 돼버렸다. 나는 도망 다니던 와중에 친구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눈이 뒤집혔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박정희를 무너뜨리겠다’고 맹세했다.”

김지하는 서울 답십리 친구 집에 숨어 겨울을 넘기고 이듬해 66년 봄까지 지낸다. 그 사이 답십리 시장 근처에서 모친도 몰래 만났다. 아들 걱정에 많이 늙어버린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돌아오는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어느 날은 서대문구치소 뒤쪽 담 너머에 있는 지인의 집 마당에서 바로 마주 보이는 감방 창문을 통해 감옥에 들어간 박재일과 손짓 발짓으로 안부를 주고받기도 했다. 다시 김지하의 말이다.

“박재일은 나더러 나타나지 말라고, 붙들리면 크게 고생한다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나는 오른팔을 들어 그가 볼 수 있게 큼지막하게 ‘건강’ ‘신념’ ‘낙관’이라고 써주었다. 말은 나누지 못하고 몸짓으로만 했던 통방(교도소나 유치장에서 수감자끼리 암호로 의사를 통하는 것)이었다… 그 긴 수배기간 동안 친구 집에 있던 책도 다 읽고 찾아온 선후배들과 운동에 대해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그러면서 내가 앞으로 해나갈 일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

봄이 오면서 정국 상황도 좀 누그러졌다. 학생운동권에 대한 수배도 풀렸다.

김지하는 학교 선배가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수배가 풀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미 사건이 종결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6개월에 걸친 긴 도피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지막 학기 등록을 마쳤다.

졸업을 앞두고는 있었지만 몸과 마음은 피폐했다. 걸핏하면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해골처럼 마른 몸에 끊임없이 기침을 하며 피가래를 뱉어냈다. 어떤 때는 호흡장애까지 왔다. 그러나 병원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당시 그에게는 살겠다는 의지가 별로 없었다. 폭음(暴飮)도 계속했다. 안주라고 해봐야 소금이나 사과 반쪽이 전부였다.

마침내 66년 8월 김지하는 7년 반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하지만 그는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꿈도 잃고 건강도 잃었다. 희망이 없었다. 생래적으로 조직을 싫어했던 그는 늘 혼자였다. 그는 언젠가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20대에는 정말 살기가 싫었다. 술이 아니면 살 수가 없었다. 술도 무슨 좋은 술인가? 막소주, 순 화학주에 안주는 소금이었다. 그래서 내가 몸이 망가졌다. 이제 술은 완전히 끊었지만 왜 그때 그렇게 술을 먹었을까 생각해본다. 고민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무슨 고민? 그땐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느냐고? 예를 하나 들까. 그때 통일벼가 나왔다. 수확량이 많으니까 그걸로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품질은 엉망이야, 못 먹어. 그래서 그것을 아는 농민이 술에 잔뜩 취해서 농촌지도소 직원 앞에서 “제기랄, 통일벼도 벼냐?” 했다. 그러자 덜커덕 잡혀갔다. 감히 대통령의 지도노선을 비판하느냐? 그것은 북괴를 이롭게 하는 발언이다 해 가지고 반공법 4조 1항인가, 5항인가로 들어가게 한 거다. 택시 안에서 체제에 대해서 불평을 털어놓아도 그 길로 잡혀갔다. 이런 세상이 어디 있나? 그런 세상에서,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철학을 공부하고 미학을 공부할 마음이 나겠나.”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급기야 자살을 시도한다. 다시 그의 말이다.

“어느 날이었다. 길을 가는데 심한 피비린내와 함께 목구멍에서 핏덩이가 꿀꺽하고 넘어왔다. 길바닥에 흩어진 피가 시커멓게 보였다. 나는 담배를 꺼내 피웠다. 또 기침이 터졌다. 핏덩이가 또 넘어왔다. 숨이 찼지만 담배를 더 깊숙이 빨아 마셨다. 그러면서 오늘 밤이 새기 전에 살 건지, 죽을 건지 ‘빨리 결정하자’고 생각했다. 나는 농약을 사다 놓고 소주를 퍼마셨다. 인사불성이 된 상태에서 그래도 마지막이니 내 인생에 점을 한번 쳐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왼손바닥에 침을 탁 뱉고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침을 탁 때려서 침이 오른쪽으로 튀면 요양원에 들어가 몇 년이든 각오하고 병을 고칠 것이며 왼쪽으로 튀면 시골 아무데나 내려가 농약을 마시고 죽어버리겠다는 거였다. 처음엔 침이 잘 안 나와 두 번 세 번 그렇게 했다. 네 번째에야 제대로 튀었다. 오른쪽이었다.”

며칠 뒤 그는 송철원의 부친 송상근(당시 용산철도병원장)의 주선으로 서대문시립병원 폐결핵 요양원에 입원했다.

진단은 ‘기흉’이었다. 기관지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김지하의 폐 상태는 심각했다. 엑스레이는 거의 하얗고 검은 부분도 흰 선과 점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의사는 수술 대신 약물로 치료하겠다고 결정했다. 약을 듬뿍듬뿍 먹어대니 기침도 차츰 줄고 피가래도 그치고 숨도 덜 찼다. 다시 그의 말이다.

“하루 종일 침대를 지고 있어야 했다. 라디오가 유일한 친구였다. 병이 다 힘들지만 폐결핵은 참으로 힘든 병이다. 밥맛은 없는데 고기반찬 밥 과일을 배터지게 먹어야 하고 온갖 생각이 출몰하는데 잠은 잘 자야 하는 병이었다. 먹으면 토하는데도 꼬박꼬박 그 많은 약을 다 먹어야 하고 소화도 안 되는데 밥을 많이 먹어야 하며 우울증이 깊은 데도 명랑해야 한다. 약값도 비쌌다. 여자 생각이나 술 생각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을 멀리할 수 있는 철학적이고 심각한 책은 또 읽지 말아야 했다. 장기 입원 환자인 내게 폐결핵은 일종의 정신병이었다. 잡념이 많고 종일 누워 있으니 낮에는 자고 밤에는 말똥말똥해져 불면증도 심했다.”

김지하는 침대 머리맡에 ‘무조건 먹자’라고 써 붙였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무려 2년 반을 요양한다. 세상은 그를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김지하#자살#수배령#기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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