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벙어리 저금통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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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내가 서울에 갔을 때 시장에서 어떤 그릇을 보았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평평하며 속은 비었고 꼭대기에 일(一) 자 형태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못 보던 것이라 마부에게 “이것이 무슨 그릇이냐” 하고 물으니 “벙어리입니다. 입은 있으면서 말을 못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아이들이 돈이 생기면 그 속에 넣었다가 가득 찬 뒤에 부수고 꺼내니, 돈을 함부로 쓰지 않고자 함입니다” 하였다. 곁에 있던 여관 주인이 말하였다. “이 그릇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벙어리와 다름이 없다고 풍자하는 것이 하나요, 사람이 말을 해서는 안 될 때 말을 하면 재앙을 겪게 되니 마땅히 벙어리처럼 있어야 한다고 경계하는 것이 또 하나입니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1712∼1791) 선생의 문집에 실린 ‘벙어리저금통 이야기(啞器說)’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발명품으로만 알았던 벙어리저금통에 이런 심오한 뜻이 들어있었군요. 계속되는 여관 주인의 말입니다.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우리 임금은 이미 성스럽고 우리나라는 이미 잘 다스려진다’ 하여 한 달이 가도록 임금의 덕을 논하는 사람이 없고 일 년이 가도록 국정을 논하는 사람이 없다면, 이것이 벙어리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이 풍자입니다. 지위도 없으면서 국정의 장단을 논하고, 자신의 책임이 아닌데도 조정의 득실을 말하며, 심한 경우 공(公)을 등지면서 당(黨)을 위해 죽고, 눈을 부릅뜨고 어려운 일을 말하다가 마침내 임금을 배반하는 죄를 저질러 몸이 죽고 세상에 화를 끼치게 된다는 것이 이른바 경계입니다. 이제 만약 그 풍자하는 뜻을 알아서 반성한다면 조정의 명신이 될 것이요, 그 경계하는 바를 알아 조심한다면 처세하는 데 통달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今若知其譏而反之, 則將爲朝廷之名臣, 知其戒而法之, 則當爲處世之通人).

순암 선생은 이 글에 이어 ‘벙어리저금통을 깨뜨린 이야기(破啞器說)’를 쓰셨습니다. 저 물건 때문에 조정에서는 말해야 할 일도 말하지 않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으니, 성세(聖世)에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라며 깨부순 것입니다. 누구든 해야 할 말은 할 수 있어야 좋은 세상이 될 것이고, 벙어리저금통도 조금은 덜 억울할 것입니다.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순암 선생#안정복#벙어리저금통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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