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칼럼]대학이냐, 학과냐, 전공이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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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구조조정 쓰나미 속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명품학과들 전국 곳곳에 등장
적성과 소질 무시하고 점수에 맞춘 대학, 학과 선택은
좌절과 고통을 부채질할 뿐
대학보다 학과, 전공 중심으로 이젠 수험생이 선택기준 바꿀때

심규선 대기자
심규선 대기자
“스물넷. 나는 지금의 우리를 민달팽이라 부르고 싶다. 숨을 껍데기 하나 없이 온몸으로 세상을 기어가야만 하는 민달팽이. 비와 눈, 모진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느릿느릿 기어가야만 하는 숙명을 짊어진…. 제대로 앞을 볼 수 있는 눈도, 온전히 세상 속에서 버텨낼 두 다리도 없이 미끌미끌한 눈물과 땀이라는 점액질을 세상에 묻히며 기어가는 민달팽이. 우리는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껍데기를 찾아서 너무 먼 길을 기어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방의 번듯한 국립대에 재학 중인 한 여대생의 글이다. 각박한 현실, 희망 없는 미래에 대한 자조로 가득하다. 안쓰럽다. 살 곳(껍데기)을 찾기 어려운 젊은 세대를 ‘민달팽이 세대’라고 부른다지만, 그들에게 없는 것은 살 곳만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의지, 전망, 확신이 없다.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에게 아무런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눙치려는 우리 사회의 책임이 더 크다.

대학은 요즘 구조조정의 쓰나미 속에 있다. 저출산 때문에 2013학년도에 63만 명이던 고교 졸업자는 2023학년도엔 40만 명으로 급감한다. 2018학년도엔 대학 입학 정원이 고졸자보다 많아진다. 교육당국은 현재 56만 명인 대학 입학 정원을 2023학년도까지 단계적으로 16만 명 감축하겠다고 선언했다. 대학을 5등급(A∼E)으로 평가해 하위 D, E등급 대학의 구조개혁을 강제하겠다는 복안이다.

평가 기준에 대한 논란은 접어두자. 일부 대학에서 취업률이 낮은 학과를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은 예상됐던 부작용이다. 그렇지만 평가 없이 개혁 없고, 개혁 없인 생존도 없다. 방법이 문제일 뿐, 방향까지 문제 삼을 순 없다. 기초 학문과 예체능은 물론 보호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변화를 막는 방패로 쓰여선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것인가. 변화에 대처하는 대학들의 움직임을 종합하면 확연하게 몇 가지 키워드가 감지된다. 선택과 집중, 학문의 융복합, 실무형 커리큘럼 도입, 취업활동 강화, 지역사회와의 연계, 기업 및 선후배와의 네트워크 구축, 교내외 청년 창업 장려 등이다. 글로벌을 지향하거나 틈새시장을 특화하는 곳도 있다. 어떤 흐름이든 수요자 중심의 사고와 비즈니스 마인드를 중시한다.

일각에서는 취업률을 높이려는 노력을 비판한다. 연구와 교육의 전당을 취업사관학교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긴 하다. 그러나 취업률이 전부는 아니지만, 무시해서도 안 된다. 그동안 대학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데 실패했다. 취업률에 목을 매게 된 것은 그에 대한 반작용이다.

대학이 바뀌면 상황은 나아질 것인가. 또 하나 중요한 변수가 남아 있다. 대학을 선택하는 수험생의 입장이다. 아직도 수험생들은 자신의 적성이나 소질보다는 점수에 맞춰 대학이나 학과를 선택하는 경향이 강하다. 부모가 더 그렇다. 그 결과, 좌절하고 실망한다.

이젠 선택의 기준을 대학이 아니라 학과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학과보다 전공 중심이면 더 좋다. 대학은 최근 융복합 추세에 따라 학과를 통폐합해 학부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학부 안에 몇 개의 전공트랙이나 연계 전공을 만든다. 기존의 복수전공이나 부전공과는 다르다. 합쳐서 넓게, 나눠서 깊게 교육하겠다는 것이다. 실무형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다. 수험생과 학부모도 이런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대학의 변화는 누가 선도하고 있나. 총장은 당연히 변화를 독려하고 있고, 일부 학과의 교수들은 감동적일 만큼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대학 행정 그룹의 일부와 상당수 교수들은 아직도 달콤한 과거에 안주하고 있다. 방관자 집단을 얼마나 빨리 줄이느냐가 대학의 존폐를 가를 게 분명하다.

어느 대학이 죽든 살든 수험생과는 관계가 없다. 대학이 갑이 아니라 수험생이 갑인 시대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있는 총장, 창의적인 커리큘럼을 짜기 위해 고민하는 학과, 제자들의 고통과 성공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교수, 대학을 지역발전의 거점으로 사랑하는 주민들이 있는 곳이 곧 신흥 명문대학이다. 교육 당국은 이런 대학을 발굴해 파격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아도 입학만 하면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치고 취업까지 책임지겠다는 새로운 명문대학과 명품학과들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이젠 수험생이 바뀔 차례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민달팽이#대학#구조개혁#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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