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칼럼]불꽃놀이 할 때는 벚꽃을 보지 않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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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자원-비자금 수사는 매년 볼 수 있는 벚꽃이고
메가톤급 ‘성완종 리스트’는 언제 볼지 모를 불꽃놀이
리스트에 쏠리는 관심은 당연…무엇부터 규명할지도 자명
리스트 수사에 명운 걸 곳은 검찰이 아니라 정권이다

심규선 대기자
심규선 대기자
참으로 극적이다. 호기롭게 부패척결을 선언한 지 한 달도 채 안 돼 공수(攻守)가 완전히 뒤바뀐 것은 희극적이고, 집권 3년 차에 신발 끈을 조여 매다 발목지뢰를 밟아 걷기도 힘들게 된 것은 비극적이다.

이완구 총리가 대국민담화를 통해 부패척결을 선언한 직후 ‘부패척결 선언, 찬밥 데워 먹는 느낌’이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부패척결 자체를 반대한 게 아니고 수사 시기와 대상, 방법을 우려했다. 그러나 일각에서 부패척결에 무슨 조건이 필요한가, 수사에 딴지를 걸지 말라는 비판을 받았다. 대통령도 국무회의에서 “비리의 덩어리를 들어내야 한다”면서 이 총리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성완종 회장의 자살로 우려는 현실이 됐다. 찬밥 데워 허겁지겁 먹다 급체에 걸린 모양새다.

검찰이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의외로 빠른 결정이다. 그 배경에는 파장이 너무 크고 오래갈 것 같다는 판단, 정치권과 여론의 압박, 검찰의 위신 회복 의지 등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검찰은 수사 결정을 혼자서 한 것인가. 부패척결 수사는 정권의 기획수사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리스트 수사까지 자체적으로 내린 결정이라고 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주문이 있다.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검찰 수사에 힘을 실어줬으면 한다. 대변인을 통해서 성역없는 엄정 대처를 주문했지만 국무회의에서든, 수석비서관회의에서든 ‘육성’으로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게 대통령에게도 득이다. 많은 사람들은 청와대의 속내는 이번 사안을 ‘사실의 영역’에 붙잡아두고 싶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곧바로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왔다. 이 정부 실세 중의 실세들에게 쏠린 의혹이다. 허태열 전 비서실장의 7억 원과 홍문종 의원의 2억 원 의혹은 대통령의 당내 경선과 대선자금에 관한 것이다. 폭발성이 매우 강하고 대통령이 자랑하는 ‘도덕성’과도 직결된다. 그래서 대통령의 ‘육성’이 필요하다.

이 총리는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검찰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는 분명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관용 원칙에 입각해” 고질적 적폐를 척결하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다. 이번 일이 꼭 그런 사안이다.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있는 이 총리가 총리 자리를 앞세워 그 역할을 고집한다면 엄청난 파란이 일 것이다.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이병기 비서실장의 해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실장은 억울하다는 성 회장에게 “잘못한 게 없으면 당당하게 조사를 받아라”라고 충고했다. 옳다. 실세들이라고 해서 다른 해법이 있을 수 없다.

리스트에 언급된 당사자들은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게 마땅하다. 앞으로는 판에 박은 듯한 해명도 안 하는 게 좋겠다. 수사를 기다리면 될 일이다. 성 회장은 정권 실세에 기대를 걸었지만, 정권 실세인 그들이 기댈 곳은 국민뿐이고 국민은 사실 규명을 원하고 있다.

여당도 잊어야 한다. 여당 의원들은 대통령이나 행정부가 이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응해 잔불이 오래간다면 곧바로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다. 내년 4월 총선에서 각자도생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검찰에 신속한 수사를 촉구하고 외압이 있다면 앞장서 막겠다고 한 것은 그 전조다.

칼을 돌려 잡아야 할 검찰은 딱하다. 현재 진행 중인 방산, 자원, 대기업 비자금 수사는 동력을 잃었다. 하늘에서 불꽃놀이가 한창인데, 누가 땅 위의 벚꽃에 눈을 줄 것인가. 벚꽃은 그 자리에서 내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꽃을 피우겠지만, 이번 불꽃놀이는 두 번 다시 보기 힘들다. 검찰이 지금 하고 있는 수사에서 수십조, 수백조 원의 비리를 규명한다 해도 홍문종 의원 2억 원에 대한 관심에는 못 미칠 것이다. 그게 지금의 분위기다. 환경과 조건이 나쁘긴 하지만 검찰이 리스트 수사에 착수한 것은 옳은 결정이다. 다만, 제대로 진실 규명을 못 한다면 새로 도입된 상설특검에 이 사건을 처음 상납하는 불명예를 각오해야 한다.

검찰이 어떤 결과를 내놓든 논란은 계속될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규명하지 못하는 쟁점도 꽤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완종 리스트를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아니 그런 인상만이라도 드러낸다면 이 정권은 더 큰 불행을 잉태하게 될 것이다. 급체는 어떤 수를 쓰든 일단 뚫어야만 다시 밥을 먹을 수 있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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