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박원순의 갈림길, 서울역 고가공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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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청계천 복원… 떠올리게 하는 승부수
광화문-남대문-용산 이르는 한국의 대표 거리 차단하고
옛 서울역의 역사성 침해
‘대선 프로젝트’라면 밀어붙이기 중단 해야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역 고가도로를 공원으로 조성하려는 계획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청계천 복원 사업과 흡사한 점이 많다. 서울시장으로서 이런저런 수치로 나타나는 실적이 아니라, 대중이 직접 체감하는 기념물을 통해 널리 인정받기 위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교통 문제 등으로 인근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에 직면해 있는 것도 청계천 때와 다르지 않다.

복원된 청계천이 ‘대통령 이명박’을 만드는 데 기여했듯이 서울역 고가공원이 완성된 뒤 서울 시민들로부터 어떤 반응을 얻어내느냐에 따라 잠재적 대권 주자의 위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서울시장 취임 뒤 이렇다 할 치적을 내놓지 못한 박 시장은 차기 대통령선거 직전인 ‘2017년 완공’이라는 시한을 정해 놓고 이 계획에 강한 의지를 보여 왔다. 더 큰 꿈을 향한 승부수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서울역 고가공원은 1970년대에 주로 세워진 고가도로 가운데 하나를 ‘미래에 남기는 유산’으로 보존한다는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효용 가치가 사라진 고가도로의 차량 통행 기능을 종료시키고 그 위에 나무를 심어 시민들을 위한 정원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국제 공모를 통해 네덜란드 건축가 비니 마스의 설계안도 채택됐다. 서울이 ‘600년 도시’라지만 창덕궁 등 몇몇 궁궐을 제외하면 온통 현대식 건물들이다. 인간적 체취는 느낄 수 없고 도시의 삭막함이 지배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시대별 역사의 자취를 남겨두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하지만 적절한 대상을 골랐는지는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서울역 고가도로는 옛 서울역 건물을 불과 10여 m 옆으로 지나고 있다. 서울에서 근현대사의 애환이 많이 서려 있는 곳을 꼽을 때 서울역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여러 지방을 연결하는 서울의 관문 역할을 변함없이 해내고 있다. 문화재청이 옛 서울역을 사적(史蹟) 284호로 지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고가도로 철거가 대세라면 오히려 철거 1순위에 올라야 할 곳이다. 가까이 가 보면 옛 서울역 건물과 부딪치기라도 할 듯 아찔한 느낌을 준다. 고가도로 건설 당시 어떻게 이런 난폭한 발상이 가능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조금 북쪽으로 걸어 올라가 남대문 쪽에서 내려다보면 시야 정면에서 좌우를 관통하면서 가로막고 있는 게 바로 서울역 고가도로다. 이 문제는 옛 서울역의 문화재 가치를 해치는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역사 도시’ 서울을 대표하는 거리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출발해 시청을 거쳐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조선시대 정도전이 한양을 설계할 때부터 이런 도시계획 아래 이뤄졌고 남대문을 서울 4대문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게 만든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신들이 먼 길을 떠나거나 장수가 전쟁하러 갈 때 임금이 친히 남대문 밖까지 나와 전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거리는 세월이 쌓이면서 용산을 거쳐 한강에 이르는 거리로 확장되어 왔다. 용산 미군기지가 우리에게 반환되고 그 자리에 대규모 민족공원이 조성되면 이 거리의 상징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서울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거리라고 할 만하다. 서울역 고가도로는 그 길목의 한가운데를 차단하고 있다. 박 시장이 이번 계획을 무사히 완료하더라도 두고두고 시비가 생길 수밖에 없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광화문에서 남대문을 거쳐 한강에 이르는 거리를 ‘국가상징 거리’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공모를 통해 거리 이름을 ‘한가온 거리’로 명명하기도 했다. ‘세상의 중심 거리’ ‘대한민국의 중심 거리’라는 뜻이다. 최근 서울시는 난데없이 서울역 고가공원에서 을지로를 거쳐 세운상가에 이르는 거리를 국가상징 거리로 키우겠다고 밝혔다. 이 거리가 한국을 대표한다고 보는 시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 때 계획을 의식하는 건지, 아니면 서울역 고가공원에 대한 반대 의견을 의식하는 건지 몰라도 박 시장 측이 몹시 조급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박 시장의 시정(市政) 가운데 사람과 역사, 문화를 중시하는 방향은 나무랄 게 없다. 이번 계획도 서울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뤄졌다면 박수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서울역 고가공원이 성공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박 시장도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계획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는 것이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막는 길이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박원순#갈림길#서울역 고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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