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윗분의 뜻’만 받드는 비서실장은 안 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22일 21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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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대통령한테 직언 마라” JP는 이완구 총리에게 충고
“욕을 퍼부을 용기 없으면 나가라” 백악관 비서실장 ‘럼즈펠드의 룰’
대통령 命도 아닌 뜻 받들어 모신 김기춘 실장과 박정희 유신의 기억
취임 2주년부터는 벗어나기를

김순덕 논설실장
김순덕 논설실장
역시 ‘영원한 2인자’에 진정한 고향 어른답다.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포스트 JP’ 이완구 새 총리에게 해준 조언 말이다.

“아무래도 여성(대통령)이라 생각하는 게 남자들보다는 섬세하다. 절대로 거기에 저촉되는 말을 먼저 하지 말고 선행(先行)하지 마라”라고 했던 JP는 그래도 못 미더웠는지 어제도 “대통령한테 직언하겠다, 비판하겠다 소리 일절 입에 담지 말라고 했다”고 다시 강조했다.

총리에게든 누구에게든 “직언하라”고 충고하기는 쉽다. 하지만 “직언하지 마라”는 말을, 그것도 언론이 들을 때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권력의 속성을 알고, 박근혜 대통령과 이 총리를 다 안다 싶은 JP만 할 수 있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할 말이 있으면 조용히 가서 건의 드리고, 밖에는 일절 말하지 마라”라는 게 JP의 진짜 충고라지만 실제로 할지 안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결코 직언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그 매끄러운 처신 때문에 JP가 영원히 1인자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도 알려줬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이 총리에게 직언을 기대할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대통령비서실장의 본업은 직언이어야 한다. 한국행정연구원이 펴낸 ‘대통령비서실의 기능과 역할에 관한 연구’에서 한광옥 전 비서실장(김대중 정부)이 첫손에 꼽은 역할도 직언이었다. 직언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라는 비서실장의 특성상 꼭 필요한 일이라는 거다.

우리나라만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가 유난해서가 아니다. 미국에서 2001년 ‘백악관 프로젝트’로 나온 ‘대통령비서실’ 보고서도 “대통령비서실이 대통령의 성공적 직무 수행에 핵심”이라며 그중에서도 중요한 역할이 나쁜 뉴스를 전하는 것과 “No”라는 말이라고 했다. 심지어 제럴드 포드 대통령 때 비서실장을 지낸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은 “대통령에게 욕을 퍼붓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없거나 용기가 없다면 남아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을 ‘럼즈펠드 룰’로 꼽았다.

“보기 드물게 사심 없는 분”이라는 박 대통령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김기춘 비서실장이 청와대를 망친 장본인으로 불명예 퇴진해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2013년 8월 6일 그의 첫 공식 브리핑은 “윗분의 뜻을 받들어”로 시작되는 청와대 5자회담 제안이었다. 명(命)도 아니고, 말씀도 아니고, ‘뜻’이라는 건 뜯어볼수록 묘한 단어다. 윗분이 말하지 않아도 백발백중 의중을 알아맞힐 능력과 자신이 없으면 입에 올리기 힘든 말이기도 하다.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통령의 명을 받아’로 시작되는 대통령비서실 직제 제3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처럼 권위주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주는 말도 드물다.

돌이켜보면, 5자회담 제안처럼 그가 윗분의 뜻을 받든 일이 제대로 된 것도 거의 없다. 적어도 국민에게 알려진 바는 그렇다. ‘문고리 권력 3인방’ 비서관들을 비롯한 청와대 관리부터 국가기강 문란이라던 문건 유출에다, 인사위원장으로서 책임져야 마땅한 숱한 인사 참사, 심지어 정책조정 미비까지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그래서 궁금하고 기이하다는 거다. 대체 대통령은 김 실장에게 ‘사심 없다’는 것 하나만 갖고 한사코 붙잡고 놓지 못한 것인지(남의 돈 받고 일하면서 사심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가?) 아니면 대통령과 국가 보호 차원에서 국민이 모르는 엄청난 비밀 공작이라도 해놓았다는 것인지.

2년 전 출범할 때 박근혜 정부가 강조한 것은 ‘슬림한 청와대’였다. 김 실장 전까지만 해도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중추는 비서실”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대통령 ‘1인 리더십’으로 뛰기 지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배적 유형’의 김 실장이 들어오면서 청와대비서실은 박정희 유신시대와 똑같은 ‘권한 집중형’ 스타일로 굳어졌다는 것이 행정연구원의 평가다. 어떤 비판을 받더라도 박 대통령이 결코 들어서는 안 될 ‘유신 독재’ 소리를 김 실장으로 인해 듣게 됐다는 건, 그 아버지의 딸로서 수치스러운 일이다.

다행히도 박 대통령에게는 3년 임기가 남아 있다. 대통령을 바꿀 순 없지만 대통령의 ‘또 하나의 자아’인 비서실장을 바꿀 수 있다는 건 대통령제의 희망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 이미지용이라도 좋다. 직언할 수 있는 실장을 들이기 바란다. 대통령의 뜻 받들 사람 말고, 대통령에게 대놓고 싫은 소리 할 만한 사람을 임명한다면 국민과 함께 고 박정희 대통령도 지하에서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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