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받아쓰기로 A+ 받는 서울대생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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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좋은 인재 싹쓸이해 창의적 의견 막고 틀에 박힌 ‘모범생’ 양산
법인화 이후에도 혼탁한 총장 선거는 그대로… 인재 양성에는 무책임
무사안일에 정치 종속된 교육… 한국의 미래, 어디로 가나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최근 나온 책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는 충격적인 ‘서울대 내부 보고서’이다. 저자인 이혜정 씨는 서울대에서 연구교수로 10년 넘게 재직한 교육학자다. 그는 학점 4.0 이상을 받는 학생들이 나머지 학생들과 어떻게 다를까 하는 호기심에서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최우등생의 공부 비결을 알아내면 다른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했다.

서울대 2, 3학년 가운데 학점 4.0 이상을 기록한 학생들을 모두 추려보니 150명이었다. 전체 2, 3학년생의 2.5%에 해당한다. 이들에게 연구 목적을 알려주고 인터뷰를 요청해 46명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이 결과에다가 다른 서울대 학생 1213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미국의 명문대인 미시간대와의 비교 연구를 추가했다.

연구 결과는 의외였다. 최우등생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 한 가지는 교수가 강의 중에 하는 말을 최대한 다 받아쓰는 것이었다. 어떤 학생은 교수가 농담하거나 기침하는 것까지 적는다고 했다. 수업을 통째로 녹음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러고는 수업이 끝난 뒤 집이나 도서관에서 강의 내용을 달달 외운다고 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수업과 시험 때 교수의 평소 의견을 그대로 추종하는 것이었다. 교수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더라도 자신의 의견은 포기한다는 최우등생이 전체의 90%에 달했다. 어떤 학생은 1학년 수업 때 자기 생각을 자주 드러냈다가 낮은 학점을 받은 뒤, 교수 의견을 그대로 따르는 쪽으로 바꿔 높은 학점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결국 교수의 말을 빠짐없이 필기하고, 복습을 통해 그 내용을 외우며, 교수의 생각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시험 문제에 답하면 높은 학점을 받는다는 것이다. 교수들도 이런 학생을 좋아한다는 얘기다. 요즘 지식인은 물론이고 정치인, 기업인에 이르기까지 말 잘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창의적 인재, 비판적 사고력을 지닌 인재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서울대는 여전히 한국에서 머리 좋은 학생들을 싹쓸이하다시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연구를 통해 드러난 서울대 최우등생의 면면을 보면 틀에 박힌 ‘모범생’을 키우는 데 머물거나 오히려 창의력의 싹을 잘라버리고 있는 꼴이다. 교수들이 아예 학생 교육에는 관심이 없다는 반성도 나온다. 어느 교수는 “학부생들은 버려졌다”고 한탄했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이라는 국가적 과제에서 서울대는 극도의 무책임함을 드러내고 있다.

세계적인 대학치고 ‘창의적 리더 육성’을 강조하지 않는 대학은 없다. 미국 하버드대는 ‘세계적으로 차이를 만들어 내는 지도자를 키운다’는 목표를 내걸고 있고 영국의 옥스퍼드대는 ‘교육과 연구에서 세계를 이끈다’는 비전을 선포했다. 서울대 역시 ‘소통과 공감의 역량을 갖춘 창의적 글로벌 리더 육성’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만들어 놓았으나 현실은 너무도 배반적이다.

교수들로 하여금 논문 등 연구 실적에만 매달리도록 만드는 현재의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쪽은 역시 대학 당국이다. 정부는 2012년 서울대를 법인화했다. 정부의 입김을 최대한 배제하고 자율성을 높이는 조치였다. 그럼에도 국민 세금에서 지출되는 연간 4000억 원의 예산은 이전처럼 지원받는다. 그런 만큼 책임감도 높아져야 하지만 법인화 이후 서울대에는 긍정적 변화가 엿보이지 않는다.

올해 상반기 서울대총장 선거는 간접선거 방식이라고는 하나 과거 직선제 때의 혼탁한 양상이 되풀이됐다. 해외 명문대처럼 소수로 구성된 총장추천위원회가 서울대를 진정 개혁해줄 외부 인사를 찾아나서는 일은 실현되지 않았다. 교내 이해 집단들은 선거에서 서로 높은 지분을 요구했다. 선거 과정에 정권 내 비선(秘線)이 개입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렇게 진흙탕 싸움 끝에 선출된 신임 총장은 “신입생 가운데 일반고 합격자를 60%로 늘려야 한다”는 등의 정치적 행보에 열중하고 있다.

한국 교육은 정치로 얼룩진 지 오래다. 좌파 세력이 교육을 사회 변혁을 위한 투쟁의 장소로 삼으면서 교육의 본질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이제 서울대의 ‘글로벌 리더 육성’ 따위에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일으켜 세우는 일은 힘들어도 무너지는 건 금방이다. 지금의 서울대로는 한국의 미래가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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