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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무너지는 그리스에 펄럭이는 赤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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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무너지는 그리스에 펄럭이는 赤旗

동아일보입력 2011-10-23 20:00수정 2011-10-2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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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논설위원

1997년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까지 벌였던 우리로선 그리스의 긴축반대 시위를 이해하기 힘들다. 유로존·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지 못하면 당장 나라가 거덜 날 판인데도 지난주 수요일과 목요일 아테네 시민들은 국회의사당 밖 신타그마 광장에서 붉은 깃발을 펄럭이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왜 평일이냐면 주말엔 쉬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한국에는 붉은 머리띠가 있다

그리스 쪽에서 본다면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주말마다 시위가 벌어지는 게 더 이상할지 모른다. 붉은 머리띠나 깃발에 적힌 구호를 보면 대한민국을 부도 문턱의 그리스처럼 끌고 가고야 말겠다는 결기가 펄떡이는 것 같다.

그리스 시위의 단골 주역은 그리스 공산당(KKE) 산하조직 전노동자투쟁전선((PAME)이다. 이름부터 강경해서 젊은 피가 들끓을 것 같지만 실은 젊어서부터 투쟁만 해온 중년 시위꾼들이 많다. 우리나라 단골 시위주역이 민주노동당과 긴밀한 관계인 민주노총이고, 머리띠 두르고 나서는 이들도 전문 시위꾼인 점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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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건 붉은 색깔만이 아니다. 1944년 그리스가 나치독일에서 해방된 뒤 우파 중심의 망명정부가 돌아오고, 국내에서 독립투쟁 하던 공산당이 내란(1946~49)을 일으킨 역사도 비슷하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미국이 보호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공산당 조직은 패퇴했다. 폐허가 된 경제도 미국의 마셜플랜 덕택에 살아났다. 그러나 치열한 좌우갈등의 후폭풍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공산당 멘탈리티’는 사회 구석구석 파고들었고, 미국이 그리스 군사독재(1967~74)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반미감정이 커진 점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특히 공산당과의 ‘화해 조치’가 공공부문 방만화와 도덕적 해이를 불러온 점은 남의 일 같지 않다. 81년 첫 집권한 사회당(PASOK)정부는 과거사 치유라는 명분으로 수천 명의 내전 유발자들에게 연금을 주고, 자손들에게는 공공부문 취업을 보장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당시 총리가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현 총리의 아버지이자 젊은 날 트로츠키에 심취했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다. “지금 그리스 정부지출이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을 차지하고 그 중 75%가 공공부문 월급과 연금 등 혜택으로 나가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지적했다.

겉으론 “구제금융 관둬라” “됐다(Enough is enough)” 같은 구호를 외치지만 이들의 주장은 여기서도 많이 들어본 소리다. 핵심은 반미 반외세 반정부로 요약된다. 정부의 부패와 규제도 문제지만 부자든 서민이든 탈세와 위법으로 맞서는 것도 심각하다.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좌파는 미국의 개입 때문에 공산화에 실패했다고 여전히 믿고 있어 국민이 뽑은 정부마저 정당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차라리 대놓고 공산주의를 하라”

결과의 평등을 원하는 그리스에선 당연히 반자본주의 불길도 거세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다루는 것이 정의라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잊혀진지 오래다. 조선소를 확장할라치면 임금인상부터 요구하는 노동자들 때문에 선박업이 고국을 떠나는 건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무엇보다 대학생들마저 비슷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더 절망스럽다. 아버지 파판드레우 총리는 집권 후 포퓰리즘으로도 모자라 대학생들에게 교수 학장 선출권까지 줬다. 사립대학은 아예 없고, 몇 년이든 공짜로 다닐 수 있는 국립대학들은 극좌 운동권의 산실이 됐다. 늙은 운동권은 정치판이나 노동계로 가서 직업적으로 투쟁을 한다.

최근 부도 위기에 다급해진 정부가 학기연장은 4번만 가능하게 하고, 교수평가와 대학평가를 하겠다고 발표하자 당연히 대학생들은 시위에 나섰다. 방만한 공공분야와 노조이기주의가 자신들의 일자리를 앗아가는 데는 눈 감은 채 ‘반기업’만 외치는 천치(idiot의 어원도 ‘민간인’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나왔다)들은 우리나라에도 많다.

미국의 개입으로 적화통일에 실패했다고 통탄하는 세력이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스의 방만한 공공조직처럼 만들어 재정을 파탄내고 싶은지, 서울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은 후보도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일자리를 만들어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반대니 앞뒤가 안 맞는다. ‘천치 대학생’들은 지금의 ‘반값 등록금’이 미래 자신들의 연금을 당겨쓰는 건 줄도 모르고 트위터나 날리면서 청춘을 보내고 있다.

미국의 포브스지는 “남의 돈(유럽연합의 지원)으로 부자나라들과 똑같은 풍요를 누리겠다면 그리스는 차라리 공산주의를 하라”고 썼다. 그래도 그리스에는 공산당이 ‘공산당’이라고 정체성을 밝히고 있고 결국은 도와줄 수밖에 없는 이웃국가들이 있다. 핵무기를 움켜쥔 동족의 광신집단이 없는 그리스가 차라리 우리보다 낫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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