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의 휴먼정치]우리 안의 브렉시트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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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 논설위원
박제균 논설위원
‘관료는 영혼이 없다’지만 A에게선 따뜻한 사람 냄새가 났다. 능력을 인정받아 젊어서부터 승승장구했으나 부하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고위직에 올라서도 ‘저래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소신을 잃지 않았다. 따르는 후배 공무원들이 많았고, 갑자기 옷을 벗었을 때는 선배 중에도 아까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기주의로 쪼개진 사회

기자인 나보다 더 공무원의 복지부동(伏地不動) 행태를 비판하던 A와는 딱 하나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었다. 바로 연금 문제였다. 연금개혁이 이슈가 됐을 때 공무원연금이 국민연금에 비해 얼마나 특혜인지, 혈세로 연금 재정을 메워야 하는 일반인의 박탈감이 얼마나 큰지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설명해도 씨알조차 먹히지 않았다. 그 대신 ‘평생 박봉에 고생하며 나라를 위해 헌신한 공무원의 최후 보루’라는 판에 박힌 얘기를 되풀이하곤 했다. 누구보다 수치에 밝고 객관적인 그였음에도….

중소기업을 하는 지인은 사회에서 가까워진 선배 B가 19대 국회의원이 되자 누구보다 기뻐했다. 임기 초 “꼭 한번 의원회관에 놀러오라”는 B의 얘기에 기껍게 찾아간 지인이 들은 첫마디. “나한테 뭐 부탁할 거 없어?” 마치 민원인 대하듯 하는 B의 태도에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후원금 좀 내라’ ‘행사 지원을 하라’는 요구가 많아졌다. 기분은 나빴지만 거절하기는 어려웠다는 고백이다.

언제부터 한국사회가 이토록 직역(職域)이나 지역, 혈연 또는 계파 이기주의에 함몰돼 갈가리 찢어졌을까. ‘우리가 남이가’ 식의 이익공동체만 난무할 뿐 대한민국 전체를 ‘운명공동체’로 바라보는 시각은 실종된 지 오래다. ‘내 편’과 ‘네 편’으로 싸우며 내 편이 이길 수 있다면 고립도 감수하겠다는 태도다. 총선 전후 청와대와 친박 핵심이 국민의 지탄을 받으면서도 막장 패권 드라마를 멈추지 않은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세계를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도 상대에 대한 ‘톨레랑스(관용)’가 사라진 세상의 단면도다.

그래도 과거 정치인들은 말이라도 ‘대의(大義)’를 내세웠다. 정치부 기자 초년병 시절 정치인들로부터 많이 들었던 경구(警句)가 ‘나보다는 당(黨), 당보다는 나라’였다. 언제부턴가 한국정치에서 이 말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들은 기억이 2012년 김무성 의원이 공천에 탈락한 뒤 탈당을 고민하다 백의종군(白衣從軍)을 선언할 때. 김 의원은 자신이 했던 “나보다 당이 우선이고, 당보다 나라가 우선”이란 말을 돌아봤으면 한다.

29년 전 어제, 대한민국은 운명공동체였다. ‘6·29 민주화 선언’은 지금까지 계속되는 ‘87년 체제’의 주춧돌이다. 87년 헌법은 민주화라는 대업(大業)을 이루고 이제 수명이 다했다고 나는 본다. 다들 ‘5년 단임제의 폐해’를 말하지만 눈앞의 이익에 빠져 개헌을 주도할 세력도, 지도자도 보이지 않는다.

‘나보다 당, 당보다 나라’

2013년 11월 타계한 전쟁영웅 채명신 장군. 5·16군사정변 때 5사단을 이끌고 서울로 진입해 쿠데타를 성공시킨 주역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에는 결연히 반대했다. 이 때문에 1972년 전역한 뒤 1988년까지 16년간 해외에서 사실상 유배생활을 했다. 귀국한 뒤에도 정치에는 눈도 주지 않다가 장군묘역(8평)을 마다하고 1평 사병묘역에 묻혔다. 대의를 위해 소리(小利)를 내던지는 지도자가 아쉽다.
 
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계파 이기주의#운명공동체#브렉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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