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SNS에서는]‘허언증 갤러리’를 아시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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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범 디지털통합뉴스센터 기자
권기범 디지털통합뉴스센터 기자
‘하버드 합격했습니다. … 눈물만 흐릅니다.’

1월 말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의 제목입니다. 본문에는 ‘내일 출국합니다. … 개학이 3월 2일이라더군요’라는 글이 들어가 있습니다. 한국 대학도 아닌데 3월 2일부터 수업이라니, 그것도 ‘개강’이 아니라 ‘개학’이라니, 뭔가 엉성합니다.

여기에 ‘짤방(짤림 방지)’으로 올라온 모바일 메신저 캡처를 보면, 곧 허탈한 웃음을 짓게 됩니다.

사진에서는 ‘하버드 총장’이 ‘국내 대표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완벽한 한국어’로 글쓴이에게 ‘합격 축하드립니다’라고 말을 걸어옵니다. 글쓴이가 ‘네? 정말 합격인가요?’라고 되묻자 ‘네. 실화입니다. 축하합니다’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여러모로 황당한 내용입니다. 이쯤 되면 글쓴이가 일부러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확연해지죠.

황당한 내용에 누리꾼들이 격분했냐고요? 아닙니다. ‘하버드가 어디죠? 지×대(지방 소재 대학을 비하하는 표현)라도 열심히 하시면 성공할 거예요! 힘내세요’ 같은 댓글들이 수두룩하게 달렸습니다. 거짓말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 공간의 이름은 바로 ‘허언증 갤러리’입니다. 말 그대로 ‘허언(虛言)’을 올려놓고, 서로 맞장구를 치며 노는 게시판입니다. 거짓말의 주제는 학벌 세탁, 공상과학소설, 판타지 문학을 넘나듭니다. 블록 완구와 근의 공식이 적힌 수첩 사진을 올려놓고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다니는데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장비를 개발 중’이라고 주장하거나, 투명인간인 것을 ‘인증’하겠다며 속이 빈 청바지 사진을 올리는 식이죠.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웃음을 주는 이런 글은 많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트위터에서는 프로필 사진과 이름을 사칭한 계정으로 황당한 글을 올리는 개그가 자주 올라옵니다. ‘부처님’을 사칭한 유저가 ‘예수님’을 사칭한 유저에게 ‘팬입니다’라고 메시지를 보내거나, ‘국립국어원’을 사칭한 유저가 ‘그냥 아무럿개나(아무렇게나) 써’라고 쓰는 식이죠.

어디서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허언증 개그의 참맛은 인터넷에서 많은 거짓말에 속아본 다음에야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요.

허언증 개그에는 해학과 풍자의 코드가 담겨 있습니다. ‘판춘문예’(한 인터넷 게시판 이름과 신춘문예를 합친 말로 거짓 글이 많이 올라오는 것을 비꼰 표현)에 수도 없이 속아온 누리꾼들이 이를 웃음으로 승화시킨 겁니다.

물론 그 뒤에는 익명성과 ‘거짓말 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이 인식을 유머라는 세련된 방법으로 풀어낸 누리꾼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인터넷 실명제 같은 발상보다는 훨씬 세련되지 않았나요? 앞으로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도 이렇듯 유쾌한 유머 감각으로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권기범 디지털통합뉴스센터 기자 kaki@donga.com
#허언증#갤러리#하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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