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우승한 듯… 밤새 “오히!” 외치며 자축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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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표’시민 수천명 광장 몰려와 “그리스의 자존심 지켰다” 환호
“채권단과 협상 더 험난해질 것”… 찬성표 던진 시민들은 우려 목소리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채권단의 협상안을 거부한 반대표가 예상외의 압승을 거둔 5일 밤. 아테네 중심부 신타그마 광장의 분수대는 붉은색 조명으로 타올랐다. 마치 독립기념일 축제를 벌이듯 수천 명의 시민들이 밤새 환호하며 ‘오히(OXI·반대)’ 승리를 자축했다.

이날 오후 7시 TV출구조사 결과가 ‘반대’의 승리로 나오자 투표를 마친 시민들은 하나둘씩 광장으로 모여 들었다. 시민들은 분수대 주변에서 영화음악 ‘그리스인 조르바’에 맞춰 춤을 췄고 도로에서는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며 질주했다. 시민들은 자정이 넘어서도 집으로 돌아갈 줄 몰랐고 아테네 시청은 지하철 운행을 오전 2시까지 연장했다. 마치 그리스가 월드컵에서 우승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대부분 반대표를 던진 사람으로 “그리스의 자존심을 지켰다”며 기뻐했다. 가족과 함께 광장에 나온 조르주 사라스 씨(48)는 “오늘은 그리스가 독립한 날”이라며 “지난 5년간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이제 자유를 얻게 됐다”고 말했다. 여행사에 근무한다는 안토니오스 씨(57)도 “그리스(아테네)는 기원전 스파르타의 항복 요구에 ‘노(NO)’했으며, 2차 대전 때는 무솔리니 군대의 점령을 거부했으며, 이번에는 유럽연합(EU) 채권단의 협상안 요구에 반대하는 데 성공해 그리스인으로서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테네 시민들은 ‘반대’ 투표가 유로존 이탈로 이어져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영화배급사에 근무한다는 에페테리야 씨(28·여)는 “한국이 아시아 국가이듯 그리스가 유럽 국가라는 점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며 “이제 총리가 당장 브뤼셀로 가서 유로존과 합의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이끄는 집권 시리자(급진좌파연합) 당사 앞에도 개표 방송이 진행되는 도중에 지지자들이 몰려들었다. 시리자 당원인 노조간부 마뉘엘 씨(46)는 맥주 캔을 한 손에 든 채 벼랑 끝 전술을 펼친 ‘치프라스의 승리’라고 외쳤다. 그는 “유럽에서 60% 이상의 지지율로 재신임을 받은 지도자가 과연 있느냐”며 “이제 치프라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춘 신(神)적인 존재가 됐다”고 자랑했다. ‘시리자 뉴스페이퍼’ 기자인 아지지스 팔로풀로스 씨(53)는 “오늘 그리스가 보여준 ‘빅 노(Big No)’는 유럽의 민주주의에는 ‘빅 예스’(Big Yes)”라며 “우리는 이제 그리스를 바꾸고, 유럽을 바꿀 것”이라고 기세를 올렸다.

국민투표 결과가 당초 박빙 승부 예상을 깨고 ‘반대’가 20%포인트 차가 나는 압승을 거둔 것에 대해 현지에서도 크게 놀라는 분위기다. 아리스티데스 하치스 아테네 국립대 교수는 “재산을 이미 해외로 빼돌린 부유층은 찬성 투표에 무관심했던 반면, 실업률이 55%가 넘는 청년세대들이 대거 결집해 반대표를 던진 것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투표 당일까지 투표소 주변에는 ‘반대’ 운동이 펼쳐졌으나, ‘찬성’ 캠페인 포스터는 찢겨 나뒹굴기 일쑤였다. 건축가로 일하다 실직한 일리사 씨(32)는 “지난 5년간 긴축정책으로 인한 고통으로 더이상 잃을 게 없기 때문에 ‘뭔가 바뀔 것’이라는 희망에 반대표를 찍었다”고 말했다.

요르고스 비트로스 아테네 경제대 명예교수는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유럽 지도자들의 ‘국민투표 반대=유로존 탈퇴’ 경고는 오히려 ‘협박’으로 받아들여져 반감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광장 주변에서는 이 여름밤의 축제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투표에서 찬성표나 무효표를 던진 사람들이었다.

무효표를 찍었다는 대학원생 스피로스 씨(25)는 “이번 투표가 치프라스 총리에게 정치적 승리를 가져다주었지만, 채권단과의 협상은 더욱 험난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로 치프라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이 보고서에서 권고한 부채 탕감을 본격 협상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밝혀 채권단과의 협상에 새로운 갈등을 예고했다. 부인과 함께 광장 주변 에르무 거리를 걷던 파나스코 씨(72)는 “시리자의 무책임한 선동이 그리스에 더욱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아테네=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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