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크리스마스이브의 비극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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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고 50대 구청 찾아 긴급복지지원 문의… “서류 부족” 답변에 청사 8층서 투신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천호대로 동대문구청에서 중년 남성이 이리저리 건물 내부를 헤매고 다녔다. 힘없이 터벅터벅 계단을 올랐고 술에 취한 듯 횡설수설하기도 했다. 제자리에서 고민하듯 머물러 있는 모습도 목격됐다. 1시간 가까이 건물 여러 층을 오르락내리락하던 남성은 오후 5시 30분경 8층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어 복도 끝을 향해 힘없이 걸어갔다. 이 남성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었다.

20분 뒤 구청 건물 옆 좁은 인도 위에서 시신이 발견됐다. 조금 전까지 구청 이곳저곳을 헤매던 바로 그 남성이었다. 숨진 사람은 구청 근처에서 목욕탕 구석을 개조한 월세방에 살던 이모 씨(58)로 확인됐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씨는 이날 오후 4시경 구청 3층의 복지정책과를 찾았다. 그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수년간 월 30여만 원의 생활비를 지원받았다. 그러던 중 더이상 지원금으로 살 수 없다는 생각에 공공근로에 지원키로 했다. 직접 돈을 벌어 자립하기 위해서다. 올해 5월 그는 기초생활수급을 해지했다. 그래야 공공근로 참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청자가 많아 내년 2월에야 순번이 돌아온다고 했다. 기초생활수급도, 공공근로의 끈도 떨어져 생활은 더 어려워졌고 한 달 30만 원인 방세가 밀리기 시작했다. 10월엔 27만 원을 냈고 11월 치는 5만 원밖에 내질 못했다. 이달 방세는 한 푼도 못 냈다. 주인의 눈치 탓에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리에서 잠을 청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 씨는 어디선가 들은 긴급복지지원제도에 마지막 희망을 건 듯하다. 긴급한 상황에 놓인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제도다. 대상자가 되면 6개월간 월 39만9000원을 받을 수 있어 당장 방값은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어렵게 마음먹고 24일 구청을 찾았지만 그는 빈손으로 돌아섰다. 긴급복지지원을 받으려면 6개월 이내에 일한 경험을 증명할 ‘근로확인서’가 필요했다. 담당 공무원은 “다음에 서류를 챙겨 오면 신청을 받아주겠다”고 설명했다. ‘다음’은커녕 하루하루를 버티기 힘들었던 그는 투신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담당부서를 나오고 한 시간 가까이 구청 곳곳을 돌아다니던 그는 8층 복도 끝 가로 70cm, 세로 180cm 크기의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현장에 유서는 없었고 창틀에 찍힌 이 씨의 발자국만 발견됐다.

이 씨는 가족과 왕래 없이 홀로 지내온 것으로 알려졌다. 미혼인 이 씨의 가족은 82세 노모와 여동생(56)뿐이다. 다들 형편이 어렵다 보니 같은 동대문구에 살면서도 왕래가 거의 없었다. 동생은 경찰 조사에서 “2년 전 오빠가 전화를 걸어 ‘5만 원만 보내 달라’고 해 부쳐준 것이 마지막 기억”이라고 진술했다. 얼굴을 본 것은 4년 전이었다. 그때도 이 씨는 “3만 원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고 동생은 2만 원을 더해 5만 원을 쥐여 보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전해진 비보에 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노모와 함께 병원을 찾은 동생은 빈소도 차리지 못한 채 발인 일정만 정하고 힘겹게 집으로 돌아갔다.

강홍구 기자 windup@donga.com
#생활고 50대 투신#긴급복지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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