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요즘 생각나는 중국 옛 임금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21일 21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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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요체는 인재 얻는 데 있다”
고대부터 역사에 남은 賢君들은 백성이 존경하는 인물 찾기에 심혈
당태종 “능력이야말로 등용의 기초… 관직의 上下, 인연 따져선 안 된다”
강희제 “사람을 알기 어렵다” 탄식… 그럴수록 巡幸많이 하고 귀 열었다

배인준 주필
배인준 주필
역사에서 배우고자 하면 먼 나라 옛 임금 중에도 스승이 많다. ‘그때 그 패왕(覇王)도 그랬거늘…’ 하면서 오늘을 비춰볼 수 있다.

정치사상서 ‘맹자’에서 맹자는 “탕(湯)임금은 중용(中庸)을 지켰으며, 출신을 가리지 않고 현명한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다(입현무방·立賢無方)”고 말했다. 맹자는 또 “무왕(武王)은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더 친숙하게 대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고 잊지 않았다”고 했다. 중국 역사 속의 탕왕은 기원전 16세기경 고대왕조 상(商)나라 창건자로, 중국인들은 그를 성군(聖君)으로 추앙한다. 상나라 다음 주(周)나라를 세웠다는 무왕도 중국 역사에 남은 성군이다.

1800년 전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유비는 제갈공명을 기용하기 위해 와룡강 초막(草幕)에 숨어 살던 공명을 세 번이나 찾아가 정성을 다해 마침내 공명의 마음을 얻었다. 이것이 후대에 널리 알려진 삼고초려(三顧草廬)다. 그런데 ‘삼고’는 유비가 처음도 아니고, 이미 상나라 탕왕이 인재 이윤(伊尹)을 등용하려고 삼고지례(三顧之禮), 즉 세 번 찾아가 예를 차렸다고 한다. 중국 고대사는 ‘어진 임금은 훌륭한 인재를 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그것이 현군(賢君)의 으뜸 덕목’이라고 오늘에 가르친다.

탕왕과는 딴판으로 상나라 마지막 임금 주왕(紂王)은 왕조를 잃었을 뿐 아니라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주왕의 자질은 인정했다. 주왕은 그렇게 명군의 소질은 있었으나 유아독존의 자만에 빠져 신하들이 간언할 엄두도 못 내게 했다. 독선의 어리석음이 낳은 재앙은 주왕뿐 아니라 동서고금 역사에 사례가 넘쳐난다.

진시황이 죽고 진(秦)제국이 망한 뒤인 대략 2200년 전, 유방과 항우가 천하 쟁패전을 벌였는데 승자 유방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량, 소하, 한신이라는 걸출한 인재를 썼기에 천하를 차지했고 항우는 범증이라는 인재가 있었음에도 그를 쓰지 못해 나에게 지고 말았다.”

1400년 전, 당(唐)나라 왕자 이세민은 왕위를 차지하려고 형제를 무참하게 죽게 만든다. 그런 죄업에도 불구하고 당태종이 된 이세민은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정치의 요체는 오로지 인재를 얻는 데 있다(爲政之惟在得人)’는 깨달음을 실행해 최고 인재들을 등용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형제의 난’ 와중에 자신을 제거하려 한 위징(형 이건성의 측근)을 간의대부(감사원장 격)를 거쳐 재상으로 중용한다. 이세민은 자신의 직계부하들이 ‘적장(반대파) 우대’에 불만을 드러내자 답했다. “군왕은 지공무사(至公無私)해야만 천하의 민심을 얻을 수 있다. 능력이야말로 관리를 등용하는 기초가 되어야 하며, 군주와 신하의 신구(新舊) 인연이 관직의 상하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위징은 “신하가 직언을 하면 자신의 신변이 위태롭지만 간언을 안 하면 나라가 위태롭다”면서 이세민의 잘잘못을 따졌다. 물론 그것은 이세민이 마음을 열고 위징의 200여 차례 간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위징은 “지위에 연연하는 자는 간언을 않는다”고 했다. 요즘의 한국을 내려다보면서 말하는 듯하다.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는 한족이 아닌 만주족이었음에도 유능한 한족을 더 많이 등용해 18세기 초까지 중국 역사상 최장의 태평성대를 열었다. 그는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인재를 중용하면 사회가 안정된다”고 했고, 그 말대로 실천했다. 특히 덕재겸우(德才兼憂·덕과 재능 겸비)의 인물을 찾는 데 삼고초려 이상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태감(내시)에 대해 “겉으로는 성실해 보여도 속마음은 간교하기 그지없다. 군주가 현명해야 그들이 권모술수를 부리지 못하는 법”이라며 한나라 십상시(十常侍)와 당나라 북사(北司)의 전횡을 거울로 삼았다.

강희제는 명석했지만 그 또한 “사람을 알지 못하겠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라며 적재적소 인재등용이 얼마나 어려운지 탄식했다. 그럴수록 지인선임(知人善任·인재를 잘 골라내 적재적소에 임명)하기 위해 조정 안팎에 널리 귀를 열었고, 자주 궁 밖으로 순행(巡幸)을 나갔다. 강희제는 이런 어록도 남겼다. “남에게는 금지하고 자신은 행한다면, 어찌 남들을 감복시킬 수 있겠는가(禁人而己用之, 將何以服人).” 이 또한 오늘의 한국 위정자들을 향해 던지는 말 같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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