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하나하나가 외교-통치… 대통령 말투 감안해 작성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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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이슈]대통령 연설문의 세계
TF 만들어 몇 달 전부터 논의… 민감한 내용 실제 연설선 빼기도
朴대통령 뉴욕연설 누락 논란… 靑 “배포된 초안 안들고 들어가”

‘세심형’ 박근혜 대통령 2014 광복절 행사 직전까지 수정… 시간 맞춰야하는 실무진 안절부절
‘세심형’ 박근혜 대통령 2014 광복절 행사 직전까지 수정… 시간 맞춰야하는 실무진 안절부절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 마지막 일정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24일(현지 시간) 코리아 소사이어티 등 미국 주요 연구기관 대표들과 만나 하려했던 ‘말씀자료’ 2500자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이다.

상황은 이렇다. 청와대는 관례대로 간담회 전 언론사에 사전 원고를 배포했다. “일각에서 한국이 중국에 경도되었다는 견해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는 한미 동맹의 성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오해라고 생각한다”, “과거사의 핵심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있고,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는 강도 높은 발언이 담겼다.

하지만 ‘문제의 내용’은 정작 박 대통령의 발언에서는 쏙 빠졌다고 한다. 괜한 외교적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이라 박 대통령이 현장에서 발언수위를 낮춘 것 아니냐는 추측만 있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확인’을 받지 못한 자료를 성급하게 제공하다 생긴 실수라고 해명했다.부속실과 홍보수석실의 손발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대내적으로 국정의 최고책임자이면서 대외적으로는 ‘최고 외교관(Diplomat-in-Chief)’이기도 한 대통령의 연설은 정부의 국정 철학과 정책 기조를 대내외에 천명하는 핵심적인 통치행위다. 세계 정상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외교 각축장’에선 더욱 그렇다.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고 적(敵)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한 연설을 위해 많게는 수십 명의 참모들이 숱한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치열한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최종 결단의 몫은 항상 대통령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외롭고 고독한 자리일 수도 있다.

대통령 연설문은 국정의 요체

“1974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평화통일 3원칙’을 발전시킨 통 큰 제안을 넣자.”

지난달 15일 제69회 광복절을 앞두고 대통령 경축사를 준비하는 청와대 회의 과정에서 일부 참석자 사이에서 이 같은 주장이 나왔다고 한다. 꽉 막힌 남북관계에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은 이 같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남북관계가 워낙 막혀 있으니 큰 틀의 제안이 필요하다는 보고가 올라와 논의는 했지만 결국 ‘보여 주기성’ 큰 제안보다 작아도 실천 가능한 제안을 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고 전했다. 박 대통령은 문화와 경제 협력 등 ‘작은 통로’를 통해 남북 교류와 대화의 물꼬를 트자고 제안했다. 대선 공약이었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요체인 작은 곳에서 신뢰를 쌓아 큰 협력으로 나아가자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대통령의 중요한 연설은 몇 달 전부터 준비 모드에 들어간다. 태스크포스(TF)팀이 꾸려지고 국정기획수석실을 중심으로 경축사에 들어갈 세부적인 내용을 모으는 작업을 벌인다. 관련 정부 부처의 보고와 민정수석실에서 취합된 사회 각계각층의 목소리가 담긴다. 이렇게 취합한 콘텐츠가 ‘덩어리’ 형태로 연설기록비서관실에 넘어가고 초안이 만들어진다.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는 여론수렴 과정이 더욱 광범위하게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내년이면 남북 분단 70주년을 맞고, 한일수교 역시 50주년인 해이기 때문에 대북(對北), 대일 메시지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통령 연설문 작성의 첫 관문은 연설기록비서관

연설문 초안 작성은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실이 맡는다.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는 공보수석이 연설문 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연설비서관제도가 정착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이다.

조인근 연설기록비서관은 2004년 박 대통령이 새누리당 전신인 한나라당 대표일 때 메시지팀장을 하며 손발을 맞춰온 핵심 참모다. 대선 캠프에서도 메시지 팀장을 지냈다.

흔히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을 박 대통령의 복심(腹心)이라고 부르지만 조 비서관도 박 대통령의 말투는 물론이고 스타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신년 연설, 광복절 경축사는 물론이고 외부로 공개되는 모든 대통령 메시지는 이곳을 거친다.

연설기록비서관실에서 초안이 만들어져 대통령에게 보내지면 그때부터 대통령의 다듬기가 시작된다. 어찌 보면 각 대통령의 색채가 입혀지는 순간이다. 대통령마다 스타일은 천차만별이다.

마지막까지 다듬는 모범생 朴

박 대통령은 메시지 관리에 철두철미한 걸로 유명하다. 작은 메시지 하나까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고 마지막까지 다듬는 ‘모범생형’이다.

연설 초안을 받은 뒤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대통령이 직접 수석비서관들에게 전화를 하기도 하고 원고가 크게 달라지면 첨삭해서 다시 연설기록비서관실로 보내기도 한다. 일부 연설문의 경우 ‘대통령이 며칠 밤을 샜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치밀한 수정이 이뤄진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단어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쓰고 초안에서 수정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전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연설문의 구조부터 디테일까지 대통령의 철학과 가치를 담아 ‘오너십(주인의식)’을 갖고 고친다. 그 글은 대통령의 글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광복절 경축사는 박 대통령이 행사 직전까지 연설문을 수정하는 바람에 프롬프터에 원고를 시간 맞춰 올려야 하는 실무자들이 노심초사했다는 후문이다.

모범생 같은 면모는 해외 순방을 앞두고는 더욱 두드러진다. 박 대통령은 해외 순방에 나서기 전에 현지에 가서 전하는 메시지를 모두 완성한다. 해외 순방 일정을 앞둔 경우 박 대통령이 국내 일정을 좀 여유 있게 잡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

연설문이 대략 완성되면 참모들이 모여 내용을 점검하고 보완하는 ‘독회(讀會)’를 갖는다. 박 대통령이 직접 ‘독회’를 진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수석비서관들과 모임을 주재한다. 다만 대국민 담화 등 메시지가 매우 중대한 경우 박 대통령이 직접 독회를 주관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독회형’ 이명박 前 대통령 샌드위치 먹어가며 10시간 독회… 휴가지선 지인 불러 읽어보게 해
‘독회형’ 이명박 前 대통령 샌드위치 먹어가며 10시간 독회… 휴가지선 지인 불러 읽어보게 해
MB ‘독회형’, 盧 ‘구술형’, DJ ‘첨삭형’

역대 대통령의 개성만큼이나 연설문 작성 스타일도 각양각색이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독회형’으로 불린다. 연설문이 어느 정도 틀이 잡히면 참모들과 반복적인 독회를 거쳤다고 한다. MB 시절 청와대 관계자는 “점심 먹고 시작해서 오후 10시까지 샌드위치를 먹으며 독회를 한 적도 있었다”고 전했다.

임기 마지막 해인 2012년 광복절 경축사를 놓고는 10∼15번의 독회를 거쳤다고 한다. 당시 연설문을 담당한 김영수 전 연설기록비서관에 따르면 MB가 8월 초 휴가를 떠나기 전에 경축사 초안을 올렸다고 한다. 김 전 비서관은 “이 전 대통령은 휴가지에서 지인들을 불러 독회를 한 뒤 서울로 돌아오는 중간 지점에 나를 불러 만나서 기차를 타고 함께 올라오며 연설문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휴가지에서 돌아온 MB는 독도를 전격 방문했고 광복절 전날까지 매일매일 독회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MB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한일 간의 문제가 아니라 전시 여성의 인권 문제이자 인류 보편의 가치에 관한 문제로 접근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천영우 당시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이 살을 붙이며 원고를 수정했다.

‘구술형’ 노무현 前 대통령 회식중인 비서관 호출해 원고 불러… 제대로 못 적어 내용 달라지기도
‘구술형’ 노무현 前 대통령 회식중인 비서관 호출해 원고 불러… 제대로 못 적어 내용 달라지기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구술형’이다. 강원국 노 전 대통령 연설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은 초안을 받고 나를 따로 불러 육성으로 ‘구술’을 해줬다. 2006년 신년연설 때는 15시간 동안 진행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 구술을 통해 대통령의 스타일이 그대로 담긴 연설문을 쓸 수 있었다”고 전했다. 평소 거침없는 ‘화법’에 토론을 즐긴 노 전 대통령의 스타일과 맞아떨어진다.

노 전 대통령은 ‘독회’에서도 직접 진행하면서 토론을 주도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강 전 비서관은 “노 대통령은 말하면서 생각이 떠오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5년 재임 기간에 한 번도 초안에 대해 “아주 잘됐다, 그냥 가자”고 말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연설문 초안에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의 ‘구술’ 스타일로 벌어진 에피소드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임기 첫해 광복절 경축사를 완성한 강 전 비서관은 삼청동에서 연설팀원들과 회식을 하고 있었다. 그때 노 전 대통령이 강 전 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연설 마무리를 좀 바꿨으면 좋겠다.” (노 전 대통령)

그 후 노 전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구술로 원고를 불렀다. 소주 2병 이상을 마신 강 전 비서관은 해당 내용을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고 차마 다시 물어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본인의 구술과 다른 내용의 경축사를 읽었다. 당시에는 아무런 지적도 없었던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해 지나가는 말로 “첫해 광복절 경축사가 좋았다. 그런데 ‘꼬랑지’(구술한 내용 중 뒷부분)가 없어졌더라”며 웃었다고 한다.

‘첨삭형’ 김대중 前 대통령 청와대에 연설비서관 처음 신설… 초안 올리면 ‘선생님’처럼 고쳐줘
‘첨삭형’ 김대중 前 대통령 청와대에 연설비서관 처음 신설… 초안 올리면 ‘선생님’처럼 고쳐줘
‘대중연설의 달인’으로 불렸던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이른바 빨간 펜 ‘첨삭형’이다. 연설비서관이 초안을 종이로 인쇄한 뒤 올리면 항상 그 위에 첨삭을 해서 연설비서관실로 내려보냈다고 한다.

광복절 경축사의 경우 DJ가 직접 작성한 원고로 독회를 진행하기도 했지만 참석자 범위도 작고 연설문 자체를 평하기보다 어떤 파장을 낳을지 전망하고 홍보계획을 짜는 회의였다고 강 전 비서관이 전했다. 강 전 비서관은 DJ정부 때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실 행정관으로 근무했다.

DJ의 첨삭 스타일은 문장을 다듬기보다는 자신의 기본철학과 입장이 제대로 담기지 않은데 대한 보완작업이었다고 한다. DJ는 연설마다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을 지양하고 ‘일관성 있는 메시지’를 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연설’을 역사와의 대화로 생각했다는 것. 그렇다 보니 연설비서관실에서는 DJ의 과거 발언이나 글을 찾아보고 초안을 마련했지만 그래도 놓치는 부분이 있으면 김 전 대통령이 직접 첨삭했다고 한다.

이현수 기자 soof@donga.com
#연설문#오바마#박근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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