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스타트업 하는 법[오늘과 내일/고기정]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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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송제도 개편의 회색빛 교훈… 혁신수용 의지는 결과로 남는다

고기정 경제부장
고기정 경제부장
독일에서 유럽 최초의 인쇄기가 발명된 건 1445년이었다. 그 후 30년이 채 못 돼 서유럽은 물론 동유럽에까지 인쇄기가 보급됐다. 인쇄술의 혁신은 유럽의 문화 부흥과 경제적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반면 동유럽에서 아시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던 터키 오스만제국은 인쇄 행위를 금지했다. 절대주의 왕조 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기득권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1727년 첫 인쇄소 설립이 승인됐지만 조건이 붙었다. 인쇄하는 책마다 ‘카디’라는 율법학자들의 검열을 거쳐야 했다. 이 인쇄소가 문을 닫기까지 70년간 펴낸 책은 24권이었다(대런 애쓰모글루·제임스 로빈슨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참조).

정부가 17일 운송제도 개편안을 내놓았다. 뒤늦게나마 우버 같은 승차공유 서비스를 합법화하겠다는 취지다. 단, 조건이 붙었다. 택시를 사든지, 택시면허를 임차해야 하고 사회적 기여금도 내야 한다. 시장의 문턱을 크게 높여놓은 결과가 나온 건 택시업계의 반발 때문이다.

기술혁신이 산업혁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노동시장의 최적 대안은 기존 산업 종사자가 혁신을 받아들임으로써 일자리 상실을 막는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새로 진입한 신기술 사업자에 자리를 내준다. 그래서 격렬한 저항이 수반된다. 이번 개편안도 20만 택시업계의 이런 우려가 반영돼 있다.

승차공유 전면 도입이 사실상 좌절된 것을 두고 정부가 4차 산업혁명을 포기했느니 하는 결론을 낼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이번 사안은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하려는 스타트업에 역설적 교훈을 던져줬다.

우선 사업자가 많은 시장에 도전하면 안 된다. 21세기 들어 혁신은 대부분 레드오션 시장에서 일어났다. 아마존은 무수한 사업자가 난립하는 유통업계에 뛰어들어 시장 질서를 바꿔놨다. 넷플릭스가 진출한 콘텐츠 시장도 마찬가지다. 레드오션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만큼 시장이 크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블루오션 시장보다 흔한 레드오션에서 글로벌 혁신기업들의 도전이 계속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선 신기술을 들고 레드오션에 진출하려면 기존 사업자의 비경제적 이해와 요구에 더 민감한 정부의 기류부터 읽어야 한다. 이 사업자들은 산업의 언어로는 기득권, 이익집단이지만 정부의 언어로는 서민, 노동자 또는 유권자다. 과점 시장이자 정부가 틀어쥐고 있는 은행업의 경우 금융당국이 제3의 인터넷은행을 만들어내기 위해 외부 위원회 몫인 인허가 심사까지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인터넷은행 확산은 단기적으로 전통 금융업 일자리를 줄이기 마련인데도 말이다.

스타트업들이 소비자 편익만 강조해선 시장 문턱을 넘기 어렵다는 점도 교훈 중 하나다. 승합차 공유업체 ‘타다’는 서비스 시작 6개월 만에 회원 수 50만 명을 넘었다. 타다를 안 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탄 사람은 없다고들 한다. 타다는 이번 개편안으로 서비스를 계속할 수 있을지 불투명해졌다. 원격진료도 의료 소비자 편익을 높여주는 서비스다. 하지만 정부의 좌고우면 속에 첫발도 떼지 못하고 있다.

18세기 중반 이후 3번의 산업혁명이 있었다. 그때마다 기술혁신이 기존 일자리를 해체했지만 이 때문에 실업률이 극적으로 올랐다는 근거는 없다. 그 대신 정치와 제도가 어떻게든 혁신의 명암을 수용할 의지가 있었는지는 기록과 결과로 남는다. 인쇄술 도입을 차단한 오스만제국에서 1800년대에 글을 아는 사람은 전체 국민의 2, 3%였다. 동시대 영국에선 성인 남성 60%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그 이후 두 세계가 걸어온 길은 다 아는 대로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스타트업#기술혁신#산업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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