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약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동아광장/이인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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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는 善했던 최저임금-52시간제
혜택은 대기업과 고임금 노동자, 고통은 자영업자-저소득자에 돌아가
작금의 경제상황이 너무 엄중하다

이인실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이인실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최근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면서 두 시간 내내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약과 범죄집단이 나오는 영화 특유의 충격적 장면 때문이 아니다. 불가해한 사악함에 맞서는 노련한 보안관이 은퇴를 앞두고 잔인하고 무의미한 범죄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호언했는데도 불구하고 사건을 수사할수록 더 깊은 허무감에 빠진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역사는 선과 악이라는 가치판단이 무의미할 정도로 비정하며, 질서라는 것도 존재하지만 혼돈 또한 이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원칙이라는 만고의 진리가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영화였다.

코언 형제가 감독을 맡아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코맥 매카시의 소설(No Country For Old Men)을 가감 없이 영화로 재현해 냈다고 하는데, 제목에 나오는 ‘노인’의 상징인 현명함이나 정의 등이 무력해지는 나라가 돼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처럼 과장되게 사유하지 않더라도 현실 세계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가 있을까 하는 허무감은 항상 존재한다. 대표적 사례가 대부분의 정권이 호언장담해왔던 일자리 정책이다. 의도만큼 선하고 정의로운 결과가 나왔는지 반추해보면 경제학자로서 무력감과 회의감이 든다.

중국의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한국은 기술면에서 수직적 분업관계를 형성한 중국의 고(高)성장에 힘입어 2000년대 들어 대기업·제조업·수출 중심의 성장은 했지만 고용이 늘지 않아 2000∼2008년 성장의 고용탄력성은 연평균 0.31에 불과했다.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었다. 2010년대 들어 중국의 맹렬한 기술 추격으로 수직적 분업관계가 수평적 관계로 전환하면서 수출이 어려워지고 고용 상황도 어려워졌지만, 오히려 2011∼2018년 성장의 고용탄력성은 연평균 0.40으로 높아졌다. 안타깝게도 경제 체질 강화가 아닌 재정지출을 마구 늘려 보건복지 등 일부 분야의 일자리를 늘린 덕분이었다. 하지만 2015년 이후에는 이마저도 효과가 떨어져 재정지출을 늘려도 고용탄력성이 감소하는 추세로 돌아섰고 작년에는 0.13까지 떨어져 고용 참사라는 이야기마저 나온다.

주목해야 할 것은 재정지출 확대를 통한 선한 일자리 정책이 의도처럼 경제적 약자를 위한 결과를 낳았느냐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2008∼2017년)의 263만4000개 일자리 중 44.1%가 보건복지(38.3%) 및 공공행정·국방(5.8%) 분야에서 만들어진 반면 문재인 정부(2017∼2018년)의 41만3000개 일자리는 70.5%가 보건복지(44.8%), 공공행정·국방(25.7%)에서 나왔다. 특히 질 좋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과로 사회’를 벗어나고 중장기 성장잠재력을 높이며 청년의 고용 애로를 덜어주겠다는 현 정부의 선한 의도가 반영된 ‘공공부문 81만 개 일자리 계획’의 귀결이다. 이 중 절반은 민간서비스 인력을 공공서비스 인력으로 전환하거나 비정규직 및 간접고용을 직접고용의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니 실제 일자리 창출 효과는 최대 40만 명 정도다. 이를 위해 2022년까지 27조2000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는 것이 일자리 로드맵에서 나온 추산인데 공공서비스 인력 전환 및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따른 인건비 추가 상승에 대한 예산 조달 방안은 매우 모호하다.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메우게 될 것이다. 왜 비슷한 경험을 했던 유럽 국가들이 공공의 비효율성을 절감하고 민영화나 공공·민간 경쟁 시스템을 도입했는지 살펴봐야 할 시점이다.

이달 3일 발표된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을 보면 지난해 말 계획에 비해 다른 경제지표 전망치들은 다 축소 일색인데 취업자 수는 15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늘었다. 나아가 현재의 경기 상황 악화는 지난해 말보다 악화된 대외 여건과 산업 및 인구의 구조적 변화 탓이지만 일자리 질과 증가세가 확산되고 있다고 자화자찬 중이다. 선한 의도가 낳은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근로제는 과실(果實)은 대기업과 고임금 노동자에게, 고통은 자영업·저소득자에게 돌아갔다. 기업 투자를 더 끌어내기 위해 과대 포장된 규제 샌드박스 수준의 규제 완화나 재탕 삼탕 된 제조업 르네상스 등의 대책이 나왔지만, 지금 일자리 창출을 맡은 기업은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다 함께 잘사는 포용경제’를 만들겠다는 명목상의 총론적 정책 기조에 집착하다 보니 정작 포용의 대상인 경제적 약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라고 보기엔 ‘퍼펙트 스톰’이 몰려올 수도 있는 작금의 경제 상황이 너무나도 엄중하다.
 
이인실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최저임금#주 52시간제#경제 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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