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일자리’ 전성시대에 논란도…바보야, 문제는 사업성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16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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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사간 불신의 벽이 이렇게 높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난해 말 광주시 관계자들은 지역 노동계와 현대자동차 사이를 오가며 협상 조건을 조율하느라 진땀을 뺐다. 임금은 낮추는 대신 일자리를 만드는 ‘광주형 일자리’를 둘러싼 현대차와 광주시의 8개월 동안 협상 과정은 롤러코스터와 같았다. 기자들도 덩달아 ‘광주형 일자리 성사’ 기사를 쓰다가 전체 삭제 버튼을 누르는 일이 반복됐다. 현대차는 “사업성이 없으면 투자 못한다. 원래 투자 계획안대로 해 달라”, 지역 노동계는 “5년 동안 ‘반값 임금’ 유지는 받기 어렵다”고 팽팽히 맞섰다.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광주시는 그 어렵다는 ‘노사합의’를 해냈고, 올해 1월 31일 현대차와 ‘지역경제 활성화 및 일자리 지속 창출을 위한 완성차 사업 투자협약’을 맺었다. 협약식에는 문재인 대통령도 참석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광주형 일자리가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적정임금을 유지하며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라며 “‘5월의 광주’가 민주주의의 촛불이 되었듯 이제 광주형 일자리는 경제민주주의의 불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제 2, 3 광주형 일자리는 ‘상생형 지역 일자리 모델’의 형태로 경북 구미, 경남 밀양으로 확산되고 있다. 정부가 상생형 지역 일자리 모델을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될 ‘국가균형특별법’ 개정안도 국회에 발의돼 있다. 일자리 기근 속에 정부와 기업, 지역사회, 노동계가 힘을 모으는 ‘○○형 일자리’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 광주형 구미형 밀양형 뭐가 다를까

○○형 일자리는 ‘지방자치단체가 노사민정 상생협의로 기업 투자를 이끌면 중앙정부도 패키지 지원에 나선다’는 것만 같지 구체적인 사업 모델은 제각각이다. 투자 운영 주체, 대기업 관여 정도 등이 다르다.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이 관계부처 합동으로 2월 발표한 ‘상생형 지역 일자리 모델 확산 방안’에서도 지자체의 창의적인 방안을 독려한다고 나와 있다.

11일 실무 협상이 시작된 구미형 일자리는 지금까지 공개된 것을 종합하면 일반적인 지자체 투자유치 모델과 흡사하다. LG화학이 공장을 세우면 지자체와 정부가 지원책을 주는 형태다. 7일 경북도와 구미시가 서울 LG화학 본사를 방문해 전기차 배터리 공장 투자유치 제안서를 제출했고, LG화학은 이 자리에서 배터리 소재인 양극재 공장 설립을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LG화학은 구체적인 투자 계획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있다. 구미시와 배터리 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LG화학이 5000억 원을 투자해 분양이 저조한 구미 5국가산업단지에 양극재 공장을 짓고, 1000명 미만 인원을 직접 고용하는 방안을 두고 구미시와 협상해 나갈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형 일자리 공장이 광주시가 1대 주주로서 운영 주체로 나서는 형태라면 구미형 일자리는 LG화학이 자기 공장을 세우는 모델이다. 자기 공장이기 때문에 임금은 LG화학 임금체계에서 진행된다. 따라서 협상의 주요 이슈도 광주형 일자리처럼 반값 연봉이 아니라 공장 설립시 지자체의 지원 내용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밀양형 일자리의 특징은 ‘중소기업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투자를 촉진한다’는 것이다. 10일 산업부와 경남도는 주조, 금형, 열처리 등 여러 뿌리기업이 투자 주체가 되는 밀양형 일자리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경남 창원에 있는 뿌리기업들이 2006년부터 밀양에 있는 하남일반산단으로 옮기고 싶어 했지만 지역 주민들이 환경 문제 등을 이유로 반대해 왔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이에 경남도와 중앙정부는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 측면에서 지역 주민을 설득하고, 근로자에 복지혜택 및 기업 지원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이전할 기업은 3500억 원을 신규 투자해 일자리 500여 개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 “기업 압박” “총선용” 불만도

상생형 지역 일자리 사업은 기업 투자를 망설이게 한 문제를 지자체가 협상 주체로 나서 풀어주겠다는 취지에서 이전 정책들과 비교해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광주형은 고질적인 고임금, 구미형은 해외에 비해 열악한 정부 지원, 밀양형은 지역 주민 반대 등을 지자체가 중앙정부 지원을 받아 해결해 일자리 창출로 만들려한다는 측면에서 진일보한 면이 있다.

하지만 우려도 만만치 않다. 굳이 상생형 일자리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기업이 투자할 만한 환경을 만들어주면 알아서 투자할 텐데, 지자체가 기업을 ‘찍어’ 압박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는 우려다. 벌써부터 기업들 사이에서는 “이번에는 LG인가. 선거 앞두고 지역 간 경쟁 속에 기업만 압박 받는 것 아닌가”란 걱정이 나온다.

특혜 논란도 넘어야 한다. 광주형 일자리의 경우 지역 노동계가 합의해 임금을 현대차의 반값으로 하되 정부와 지자체가 행복주택 어린이집 건립 등을 추진해 근로자의 실질임금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이에 대해 다른 자동차 부품 중소기업들은 ‘특혜’라며 불만이다. 한 중견 부품업체 관계자는 “광주형 일자리 공장 임금이 반값이라지만 세계 자동차 업계에서도 최고 수준인 현대차 연봉의 반이라는 것이지 중견 중소 부품업체보다는 높은 것 같다”며 “그런데도 왜 그들에게만 복지혜택을 몰아주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밀양도 벌써부터 총선을 앞두고 김경수 경남지사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정책이 아니냐는 뒷말이 나온다. 김 지사가 5일 성윤모 산업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정부 지원을 요청한 직후에 밀양형 일자리가 발표됐다.

● ‘바보야, 문제는 사업성이야’

이같은 논란을 딛고 상생형 지역 일자리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려면 기업 스스로 필요에 따라 투자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해야한다는 지적이다. 결국 사업성이 관건이란 얘기다.

5대 그룹 관계자는 “‘정부주도형’ 일자리 모델의 문제는 기업의 니즈보다 지역사회 요구나 정치 논리에 경도된 면이 있다는 점이다. 기업이 여론과 정치적 압박에 못 이겨 마지못해 투자한다 해도 결국 정권이 바뀌고 정부 지원도 줄면 기업도 흐지부지 발을 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상생형 지역 일자리의 물고를 튼 광주형 일자리는 30년 노사갈등으로 생산성이 떨어진 한국 자동차 산업에 의미 있는 행보라는 점에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사업성을 두고 자동차 업계에서는 의구심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광주형 일자리 법인이 공장을 지으면 현대차가 경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생산을 위탁할 예정이다. 내연기관 시장이 축소되면서 제너럴모터스(GM) 등 글로벌 기업은 공장을 폐쇄하고 있고 국내 완성차 공장도 가동률 저하에 시달리는 마당에 새로운 생산 공장이 시장성이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 불거지고 있다.

또 광주형 일자리가 현대차로부터 투자를 받기로 했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다른 투자자로부터도 사업성을 입증 받아야 한다. 현재까지 광주시, 현대차, 광주은행 등이 공개적으로 총 1020억 원 투자를 약속한 상태로 추가로 4734억 원을 투자 받아야 한다. 이에 대해 광주시 관계자는 “투자 모집 현황에 대해 구체적인 것은 말하기 어렵지만 6월 말에 투자 모집을 완료해 법인을 설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미형 일자리도 사업성을 두고 LG화학과 지자체 간 줄다리기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장세용 구미시장은 10일 구미시청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LG화학이 폴란드에 투자하기로 했던 (양극재) 10만 t 생산 물량을 국내로 돌리는 것을 검토할 것”이라며 “폴란드와 중국의 경우 (기업) 투자액의 상당부분을 국가에서 지원하는 데 구미형 일자리에 그대로 적용될지는 협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LG화학 입장에서는 폴란드에 공장 지을 때 받을 수 있는 혜택 수준과 구미에 지을 때의 혜택을 비교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구미시는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를 경기 용인시에 빼앗긴 뒤 구미형 일자리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뿔난 민심을 달래기 위한 행보일 뿐이라는 비판을 듣지 않으려면 이번 협상에서 기업에 제대로 사업성을 보장해주고 지역과 기업에 모두 도움이 되는 투자를 유치하는 선례를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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