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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아래서]〈25〉남편의 이게 필요해, 저게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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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아래서]〈25〉남편의 이게 필요해, 저게 필요해

신이현 작가입력 2019-04-16 03:00수정 2019-04-16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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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신이현 작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우리에겐 한 그루의 포도나무도 없었다. 길 가다 남의 집 담장이나 마당에 심어진 포도만 봐도 멈춰 서서 품종이 무엇인지 가지는 어떻게 뻗어갔는지 땅은 어떤지 ‘두릿두릿’ 살피며 긴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남의 집 포도밭과 포도나무가 참 부러웠다.

“이 포도나무 가지치기해서 삽목하면 될 텐데, 좀 구할 수 없을까?”

레돔은 늘 이렇게 이거 필요하다, 저거 필요하다 말한다. 나는 불만이었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없는 능력을 총동원해서 이런저런 품종의 나뭇가지들을 구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낯선 집에 들어가서 저 담장의 포도 나뭇가지를 좀 얻어갈 수 없느냐는 부탁도 여러 번 했다. 이 모든 것에 우리의 생계가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발등에 불 끄듯 일을 하게 됐다. 다행히 레돔은 얻어온 가지들을 알뜰히 잘라 젖은 흙에 꽂아 뿌리가 나게 했다. 4월이 돼서 우리는 그것을 밭에다 심을 준비를 했다.

“아, 이것 봐. 마늘 싹이 잘 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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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심었던 포도나무 발치에서 마늘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버린 마늘이었다. 한 망태기의 마늘을 제대로 먹지 않아 싹이 올라와 거름통에 버렸더니 어느새 주워와 마당 곳곳은 물론이고 포도나무 아래에 하나씩 심었던 것이 귀엽게 올라오고 있었다. 나무 발치에 마늘을 심으면 해충들이 덜 온다고 했다. 매사 나는 버리고, 그는 주워 쓰임새를 찾아냈다.

“나무 심기 전에 먼저 땅을 만들어야 해. 음, 좋은 냄새가 나는군.”

그는 자신의 보물인 거름 냄새를 맡으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1년 동안의 음식물 찌꺼기와 사과 착즙 찌꺼기, 길 가다 주운 들깨나무와 낙엽 보따리들에 술지게미가 들어가서 푹 삭은 퇴비였다. 거름을 뿌려 땅을 만든 뒤에는 정확한 간격으로 구덩이를 팠다. 그 다음에는 말린 쐐기풀 우린 물에 석회가루와 발효한 쇠똥을 섞어 걸쭉한 반죽을 만들었다. 거기에 연약한 뿌리를 푹 적신 뒤 구덩이에 심었다. 그렇게 해야 어린뿌리가 땅속 병충해에 강하게 자란다고 했다. 혹시 모를 4월의 이상기온으로 냉해를 입지 않도록 마른 짚과 콩깍지를 이불처럼 수북하게 덮어주는 것으로 포도나무 심기는 끝이 난 듯했다.

“이제 250cm 정도의 나무 막대기가 필요한데 어디서 살 수 있지?”

포도나무 넝쿨이 올라갈 철사 줄을 지지해줄 양쪽 버팀 막대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쉽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제는 대부분 쇠막대기를 쓴다고 했다. 그는 땅에다 쇠를 박기 싫다고 했다. 마침 집 뒷산에 아카시아 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있었다. 왜 나무를 베어낼까. 저 아카시아 꽃에서 우리 집 벌이 꿀을 참 많이도 땄는데 꽃이 점점 줄어든다고 걱정하면서 베어낸 아카시아 나무들 몇을 얻어왔다. 이틀에 걸쳐서 나무껍질을 벗기고 다듬더니 이윽고 끝이 뾰족한 막대기가 만들어져 땅에다 박고 긴 철사 줄을 엮었다. 이제 포도나무는 거기에 넝쿨을 뻗어 주렁주렁 포도송이를 달 일만 남았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저번에 부탁한 토끼풀 씨앗은 어떻게 됐어?” 나는 부랴부랴 씨앗을 주문했다. 그는 꼼꼼하게 일기예보를 체크한 뒤 비 오기 전날에 맞춰 씨앗을 뿌렸다. 토끼풀은 공기 중에 있는 질소를 빨아 당겨 땅에 영양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개화기가 길어 벌들이 꿀과 화분(花粉)을 실컷 딸 수 있다. 길게 뻗어나가 다른 잡풀이 자라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베면 그대로 거름이 되고 또 올라오기 때문에 포도밭에는 필수라고 했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네. 일기예보가 이렇게 맞지 않다니 어쩌란 말인지.”

토끼풀 씨를 뿌린 뒤 비가 오지 않자 그는 하늘을 보며 애간장을 태운다. 그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해내지만 그것은 나도 어찌할 수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예보한 날보다 사흘 늦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촉촉하게. 그는 포도나무 밭에 서서 비를 맞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가 오니 됐다. 이제 들어가서 난로에 불을 지피고 따뜻한 차나 한잔 마시자.”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아래서#신이현 작가#포도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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