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김혁철, 비핵화 언급도 꺼려… 김정은 올때까지 기다리라고 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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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김이 밝힌 ‘하노이 막전막후’

지난달 28일 베트남 하노이 소피텔 메트로폴 호텔에서 확대 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북-미 정상 및 핵심 참모들. 하노이=AP 뉴시스
지난달 28일 베트남 하노이 소피텔 메트로폴 호텔에서 확대 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북-미 정상 및 핵심 참모들. 하노이=AP 뉴시스
“북한 측은 하노이 정상회담 직전까지 ‘비핵화’라는 말 자체를 거론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서는 정의하지도 않고 미국의 전략자산은 물론 괌, 하와이에 있는 무기를 제거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결렬된 것이다.”

20일 오후 미국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APARC) 출신 동문 60여 명이 모인 서울 중구 서울클럽. 지난해부터 북-미 비핵화 대화를 실무 조율했던 앤드루 김 전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은 각계 인사들에게 그동안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상세히 공개되지 않았던 ‘하노이 결렬’의 전말을 1시간 넘게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김 전 센터장은 하노이 결렬 이후 한국, 특히 청와대를 바라보는 워싱턴의 시선도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있다고 했다. 한 참석자는 “김 전 센터장이 미국의 입장을 대표하는 만큼 나중에 북한의 이야기도 들어봐야겠지만 어쨌든 한국 정부도 너무 남북 경협에 매달릴 게 아니라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비핵화 이슈에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 “북한의 비핵화 의지 확인? 오직 김정은만 안다”


김 전 센터장이 이날 강연에서 공개한 하노이 회담 결렬의 핵심 이유는 대략 세 가지. 이 중 핵심은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았으면서 미국의 태평양 핵심 거점에 포진해 있는 각종 전략무기를 치우라고 주장했다가 판이 깨졌다는 것이다.

김 전 센터장은 “북한은 지난해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 때부터 ‘괌과 하와이에 있는 전략무기까지 없애야 한다’고 일관되게 이야기해 왔다”고 말한 뒤 “(미국 입장에선)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핵무기는 물론 생화학무기를 포함하는) 모든 대량살상무기(WMD)를 포기하라는 미 측의 주장은 이번 회담에서 새롭게 제기된 게 아니다. 미국은 ‘제재 해제는 북한이 (미국의 정의에 부합하는) 비핵화를 한 후’라는 원칙 이외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김혁철 대미특별대표 등 북한 실무진은 하노이 정상회담 직전까지 비핵화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다고 전했다. 다시 말해 지난달 27일 두 정상이 만나기 전까지 북-미 실무진이 종전선언, 연락사무소 등 비핵화 조치를 전제로 한 부차적인 이슈만 논의하거나 합의했다는 것. 김 전 센터장은 “북측 실무진은 ‘우리 (김정은) 위원장이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식으로만 이야기했다. 그렇다 보니 실무진 합의가 구속력을 갖기 어려웠다”며 “오로지 김정은만이 (비핵화 여부와 정도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북한 실무진은 ‘비핵화’란 말 자체를 올리는 것을 꺼렸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그렇다 보니 실무진이 논의 대상인 비핵화 시설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며 “김혁철이 핵이나 미사일 전문가라고 하는데 정작 ‘영변 밑 핵시설은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해서 스티븐 비건 등 미국 실무진이 당혹스러워했다”고도 했다. 강연에 참석한 또 다른 인사는 강연 내용을 빼곡히 적은 수첩을 펼치며 김 전 센터장이 “비핵화 의지는 김정은 본인만 알 것”이라고 적힌 부분을 보여주기도 했다.

○ “한국 역할 부각에 대해 청와대에 상당한 불신”

그럼에도 북한이 하노이에서 영변 핵시설과 핵심적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해제를 교환하겠다는 ‘무리수’를 둔 것은 미국 국내 정치 상황을 오판했기 때문이라고 김 전 센터장은 설명했다. 그는 “(북한 측이)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 위기에 몰리는 등 곤경에 처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사인하려고 나올 것이다. 영변 정도만 양보해도 제재 완화로 적극적으로 나와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마이클 코언 청문회 등으로 입지가 좁아진 상황에서 대충 (‘배드딜’에) 사인했다가는 돌이키기 어려운 정치적 위기를 맞을 수 있었다”고 했다.

김 전 센터장은 북한이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김 위원장이 (자신들이) 미국의 정치에 대해 상당한 존재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북한이 지난해 실무 협상 라인으로 ‘회담하면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며 ‘(11월) 중간선거 전 회담을 해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그는 하노이 회담 전후 한미 관계를 설명하던 중 ‘청와대’를 직접 언급하며 “비핵화 논의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이 언론을 통해 부각되는 것과 관련해 미국이 청와대 측에 상당한 불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한미동맹파’라고 하면서도 “(청와대가) 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런 것들이 (한미 간에) 계속 불신을 키워 왔다”고 말했다. 구체적 사례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한미 간에 나누지 않았던 얘기들을 청와대가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는 취지로도 해석되는 부분이다. 실제로 워싱턴 조야에선 최근 들어 한국 정부가 말하고 있는 중재자론에 대해 “백악관은 청와대에 비핵화 문제를 중재(mediate)해 달라고 한 적이 없다”는 말이 잇따르고 있다.

한기재 record@donga.com·이지훈 기자
#김혁철#비핵화#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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