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수천년 선진문물 받은 日, 최근 100년 앞섰다고 내려다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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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글로벌 석학 인터뷰]노벨물리학상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토산업대 명예교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괴짜 천재’ 마스카와 도시히데 일본 교토산업대 명예교수가 10일 대학 연구실에서 활짝 웃고 있다. 
마스카와 교수는 요즘 건강이 좋지 않다. 그럼에도 “손자들에게 전쟁의 경험을 시키지 않기 위해 언제까지건 평화를 외칠 것”이라고 
말했다. 교토=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괴짜 천재’ 마스카와 도시히데 일본 교토산업대 명예교수가 10일 대학 연구실에서 활짝 웃고 있다. 마스카와 교수는 요즘 건강이 좋지 않다. 그럼에도 “손자들에게 전쟁의 경험을 시키지 않기 위해 언제까지건 평화를 외칠 것”이라고 말했다. 교토=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유머감각이 뛰어나 ‘괴짜 천재’라 불리는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79) 교토산업대 명예교수. 그는 200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뒤 크게 세 가지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먼저 노벨상 수상식 참가 전엔 해외로 나간 적이 없는 토종 물리학자라는 점, 둘째 일본의 교육제도를 비판하고 젊은이에게 호기심과 동경을 갖고 세계에 도전하라고 열심히 권한다는 점, 셋째 2005년 평화헌법을 지키기 위한 과학자들의 9조회 설립에 나서고 2015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추진하는 안보법제 개정 반대 운동에 나서는 등 우경화에 저항하는 지식인의 자세를 고수하는 점. 이런 그는 2019년 벽두 세계의 흐름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10일 교토산업대 연구실을 찾았다. 동아일보와의 인터뷰는 2009년 2월, 2016년 3월에 이어 세 번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요즘은 어떤 연구를 하시는지요.

“이 나이쯤 되면 최신 연구보다는 시야를 넓혀 젊은이들에게 폐 안 끼치고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됩니다. 황당하다 싶은 공상들을 하고 있습니다. 성과를 얻으면 좋고, 아니어도 괜찮고…. 가령 상대성이론의 ‘동시각(同時刻)’을 생각합니다. 인간이 아는 현재 이 순간과 물리학에서 말하는 4차원 세계의 현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같은…. 다만 건강을 조금 해쳤습니다.”

세월의 흐름에는 장사 없다던가. 그는 신년 인터뷰에 응해주면서도 날짜를 가급적 늦추려 했는데, 만나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난해 11월 30일 쓰러져 한동안 말을 못 할 정도로 마비가 왔다.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는 중이다. 유머감각과 재밌는 대목에서 ‘빵’ 터지는 밝은 성격도 그대로였다.

―바깥 활동은 많이 줄인 겁니까.

“역시 나이가 나이인 만큼(웃음). 교토산업대와 나고야대, 두 학교를 오갑니다. 주 3일 정도는 근교에 지은 오두막에서 책 읽는 생활을 하지요.”

그는 독서광으로 알려져 있다. 신문도 매일 1시간씩 정독한다. 집에서 2가지, 학교에서 2가지 신문을 구석구석까지 읽는다고 했다.

2008년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수상식에 참석한 마스카와 명예교수. 그는 수상식에서 
일본어로 전쟁 체험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는 연설을 해서 많은 공감을 불렀다. 사진 출처 노벨재단
2008년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수상식에 참석한 마스카와 명예교수. 그는 수상식에서 일본어로 전쟁 체험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는 연설을 해서 많은 공감을 불렀다. 사진 출처 노벨재단
―10년 전 한국에도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나오려면 뭐가 필요한지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당장 성과가 나오기 어려운 기초과학까지 투자와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결과중심주의를 문제로 꼽았는데요, 요즘은 일본도 비슷한 분위기가 돼 가는 듯합니다.

“아베 신조 정권 이후 학계에서 여유가 사라졌습니다. 모든 게 경쟁체제거든요. 연구자금을 얻으려면 신청서를 써야 하고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고…. 연구 환경으로는 최악이죠. 눈에 보이는 결과를 빨리 내는 분야에만 자금이 모이면 기초연구나 젊은 연구자들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한국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걸 전제로 말을 이어갔다.

“여기에 더해 한국의 경우 정치가 안정되지 않았던 이유도 큰 것 같습니다. 식민지 시대(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늦게 출발했고 북한과의 대치도 있었지요. 여기에 독재정권이 있었고, 잦은 정권교체로 앞 세대의 것이 모두 부정되는 식이어서는 학술 연구 분야는 꽃피기 어렵습니다.”

―최근 한국도 그렇지만 “요즘 젊은이들 불쌍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좌절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과거 강조하셨던 ‘호기심’과 ‘동경’은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덕목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 더, 패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젊은이들을 둘러싼 환경은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게 많습니다. 학교만 봐도 과학도 학문도 복잡해져서 한 연구자가 전체상을 볼 수 없고 작은 일밖에 못 하죠. 그래도 패기는 필요합니다. 우리 때는 패전 직후 아무것도 없었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세계를 상대로 뭔가 해야 한다’는 의식이 충만했습니다. 요즘 일본 젊은이들은 유학도 기피하고 내향적이 됐습니다. 사회나 국가가 좀 더 힘을 실어주고 등을 떠밀어 줘야 하겠죠.”

―최근 한일관계가 몹시 나쁘다는 지적이 적지 않습니다.

“이웃 국가란 본래 경쟁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사이가 좋기 어렵죠.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일본은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매우 많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그랬습니다. 일본이 일어선 것은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아닌가요. 일본에는 ‘부자는 싸움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잃을 게 많기 때문이죠. 그런데 최근에는 한국과의 관계에서 사사건건 대결자세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전후 70여 년이 지나면서 세대가 바뀐 탓도 있겠죠.”

―2015년 안보법제 제·개정 때 목소리 높여 반대 운동을 하셨지만 법안은 통과됐고 아베 총리는 평화헌법 개정 집념을 갖고 추진합니다.

“과거에는 개헌 운운하면 엄청난 반대운동이 벌어졌지만 요즘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저는 아베 총리가 원하는 대로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게다가 방법도 매우 교묘합니다. 헌법 원문은 두고 조항을 추가한달지….”

그는 개헌 가능성이 있다고 보면서도 ‘결사반대’ 입장을 고수한다.

“낡은 헌법이니 현대화하자는 주장은 수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베 정권이 추구하는 방향성은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가겠다는 겁니다.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저야 이제 다 살았고 내 자식들도 스스로 생각할 나이지만 우리 손자들이 그런 경험을 하는 건 싫습니다.”

그는 슬하에 손자가 4명 있고 이 중 제일 큰 손자가 올해 18세라고 했다.

―젊은 세대일수록 개헌에 찬성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노인들은 조금이나마 전쟁의 기억을 갖고 있어서 전쟁은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아베 총리를 둘러싼 우익들은 궁극적으로는 패전 이전의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메이지 유신의 영광을 다시 한번 누리고 싶은 거죠. 천황을 국가원수로 해야 한다거나 전쟁책임을 부정하는 역사 수정주의적 관점이 자꾸 나오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개헌을 통해 전쟁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한 뒤 태평양전쟁 당시처럼 이상한 판단을 해버리면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제일주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 대국일수록 자국이기주의 흐름을 보입니다.

“각국의 이기주의가 표면화하고 이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가령 유엔 160여 개국이 대국의 이기주의에 끌려가기만 할까요. 미국의 양심도 믿고 싶습니다. 희망사항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는 1기로 끝났으면 합니다. 난 인간의 이성을 믿습니다.”

그는 2008년 노벨상 수상식 참가를 위해 처음 여권을 만든 뒤 여러 나라를 가봤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 몽골 베트남 중국 등 한자문화권에 국한됐다.

―한국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한국에는 세 번 정도 갔지만 어딜 가나 일본인이 참 많았습니다. 서울에서 그렇게 사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줄이야(웃음). 그 정도로 사람의 교류는 많은데 서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일본인의 나쁜 점은 최근 100년 정도 성공했으니 이웃 나라를 내려다보려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수천 년 역사 속에서 불과 얼마 전까지 조선이 우위였죠. 서로 좀 더 존경, 존중해도 되지 않을지요. 세계가 자국이기주의로 빠지는 상황일수록 한일 두 나라는 서로 도울 길을 찾아 사이좋게 해나갔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그게 결국은 서로 이익이 될 겁니다.”

그가 강조하는 ‘서로에게 이익’이란 말은 상당히 크게 들렸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마스카와 교수의 결론은 늘 실리적이다. 그는 개헌을 반대하는 이유로도 ‘일본이 평화헌법을 지켜 전쟁할 수 없는 나라로 남아있는 게 경제적으로 이익’이라고 했다. 그 돈을 기초과학 연구비로 돌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요즘 일본의 방위비 증가세는 굉장하다.

“저도 전쟁의 도구들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전차를 어떻게 주행시키면 몇 m 강판을 뚫을 수 있는가. 이런 건 물리학이죠. 하지만 과학자들이 정치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점도 늘 경계해야 합니다.”

―아베 정권이 무기개발 연구에 대학 연구실들을 끼워 넣으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학들의 거부 움직임이 큰 것이 재미있더군요.

“음….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노인들입니다. 그들이 사라지면 순식간에 달라질 거예요.”


교토=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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