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신춘문예 2019/중편소설 당선작]오즈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일 03시 00분


코멘트

성해나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6월, 나는 구에서 주관하는 하우스 쉐어링 사업의 세입자로 참여하게 된다. 독거노인의 남는 방을 청년들에게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내주는 단기 임대 프로젝트였다.

그해 봄에는 나의 엄마가 죽었다. 엄마는 카지노를 드나들며 사채를 쓰고 있었고, 원금보다 이자가 더 큰 빚은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다. 신용 한도를 최대로 올리고, 전세 집의 보증금을 뺀 후에도 원금은 끝내 상환하지 못했다. 하우스 쉐어링 공고를 보고 무작정 구청에 찾아간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내가 6개월간 머물 곳은 북아현동에 있는 연립이다. 20평 남짓한 그 집에 이복례라는 할머니 혼자 살고 있다. 심근증 때문에 반평생을 인공심장 박동기에 의존해온 그녀는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거리를 둔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도울 것은 없느냐’는 내 물음에도 그녀는 ‘적적하고 사람 손이 필요해 세입자를 들인 게 아니라, 보조금이 나오니까 한 것’이라며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벽이 얇은 집에선 어떤 소리든 쉽게 공유된다. 할머니가 발작을 일으키거나, 숨을 가쁘게 들이쉬는 소리도 밤마다 내 방으로 넘어온다. 쌕 쌕, 하는 천명음이 들릴 때마다 할머니가 염려되지만, 그녀가 내게 했던 말들을 떠올리면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서로의 생활에 관여하지 않고, 세입자와 집주인의 명분으로 한시적 동거하는 것. 그렇게 호의도 관심도 가지지 않은 채 할머니와 나는 한집에서 살아간다.

나의 몸 이곳저곳엔 수많은 타투가 새겨져 있다. 자해의 흔적을 감추기 위한 커버업 타투로, 집안에서는 긴 바지를 입어 그것들을 가린다. 어느 날, 무방비 상태로 욕실에서 나온 내게 할머니는 허벅지에 새긴 타투에 대해 묻는다.

“그런 거 하려면 얼마나 드냐.”

그녀에게 이것은 내가 직접 새긴 것이며,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타투를 배웠다고 설명한다. 할머니는 한참 망설이다 자신의 몸에도 타투를 새겨달라고 말한다. ‘지우고 싶은 게 있다’고 그녀는 덧붙인다.

사람의 몸이 아닌 고무판에 몇 번 연습해본 게 다라고 답해도 할머니는 고집을 쉽게 꺾지 않는다. 고집스러운 태도로 일관하는 할머니에게 나는 무엇을 새기고 싶냐 묻는다. 그녀는 고민하다 자신이 직접 만든 압화를 가슴에 새기고 싶다고 한다.

전사(문신을 위한 밑그림)를 몸에 찍기 전, 나는 할머니에게 윗옷을 벗어달라고 부탁한다. 할머니는 머뭇대다 윗옷을 들춘다.

‘くそ’

오른쪽 빗장뼈 아래 큼직하게 박힌 일본어 레터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가슴부터 늑골까지 이어진 여러 개의 문신들은 누군가 장난삼아 한 낙서처럼 무늬도 엉망이고, 잉크도 심하게 번져 있다. 그것을 보며 나는 크게 놀라지만, 애써 담담한 척 작업을 시작한다. 문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바늘이 피부에 빠르게 박히는 느낌이 조금씩 전달된다. 험하게 새겨진 일어 레터링 위에 푸르고 작은 꽃이 하나 둘 새겨진다.

빗장뼈 부근의 외곽작업을 막 마쳤을 때, 이제까지 침착하게 고통을 참던 할머니가 호흡곤란 증세를 보인다. 고르게 이어지던 숨이 거칠어지고, 인공심장박동기가 기계음을 내며 깜박이던 그 순간, 불현듯 오래전 질식사로 죽은 남동생을 떠올린다. 세탁기 안에 웅크리고 있던 동생과 그 안을 들여다보며 비명을 지르던 엄마, 집안에 쳐진 폴리스라인….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것들이 뒤엉키며 서서히 아득해진다.

할머니의 의식은 곧 돌아온다. 할머니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짧으면 한 달 길면 세 달까지 지체될 ‘커버업’ 작업을 그녀가 과연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어영부영 첫 번째 작업을 끝마치고, 나는 구글 검색엔진에 빗장뼈 아래 새겨져 있던 레터링의 뜻을 검색해본다.

‘くそ [糞] 똥; 대변’

이런 것을 할머니 몸에 새긴 사람은 누굴까. 끔찍하고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후에도 나는 할머니의 몸 상태를 살피며 시간차를 두고 꽃을 새긴다. 두 번째 작업부터 할머니와 나는 서서히 가까워진다.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가하면 서로 상의를 해 간단한 신호도 만든다.

“숨이 안 쉬어지면 참지 말고 바닥을 치세요. 한 번 치면 괜찮다, 두 번 치면 멈춰라.”

조금씩 마음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할머니는 가슴에 새겨진 문신에 대해선 말을 아낀다. ‘똥; 대변…’ 포털 사이트에서 찾은 단어의 뜻이 자꾸만 마음에 맴돈다. 나도 모르게 실언이 나온다.

“누가 이런 문신을 새긴 거예요?”

내 물음에 할머니는 답을 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먼저 상처를 내보인다. 수없이 자해를 하고, 피를 내고 응급실에 실려 간 흔적들이 허벅지부터 치골까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이제 할머니도 나도 서로 약점 하나씩은 알고 있는 거예요.”

할머니는 여전히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 밤, 나는 얇은 벽을 타고 넘어오는 할머니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다시 과거를 떠올린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 동생을 돌봐야 했던 날들. 쉼 없이 애정을 갈구하고, 보채는 동생을 온전히 전담하기엔 나 역시도 너무 어리고 미숙했다. 동생을 내버려둔 채,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연애담을 나눴던 열일곱의 그날을 회고하며 나는 중얼댄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야.”

동생의 죽음이 내 과실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기면서도, 나는 그 사실을 애써 부정한다. 할머니의 방에서는 여전히 신음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녀의 고통 역시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 생각하며 잠이 든다.

세 번째 작업을 하던 날, 이전의 일들로 서먹했던 그녀와 나는 갈비뼈 위로 꽃을 조금씩 새겨 넣으며 전보다 더 긴밀해진다. ‘재미있는 얘기 좀 해달라’고 장난을 거는 내게 할머니는 넌지시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함께 종로에 있는 단관 극장에 간다. 매표원은 ‘오즈의 마법사’가 상영하는 날마다 매번 극장을 찾는 할머니를 ‘오즈 씨’라 부른다. 언젠가 할머니는 자신을 ‘할머니’가 아닌 ‘오즈’라 부르라고, 그것이 제 진짜 이름이라고 이야기한 것을 나는 기억해낸다. 그 말을 들은 후에도 나는 그녀를 오즈라 부르지 않았다. 퉁명스럽고 고집 센 그녀와 받침이 없고 부드러운 오즈란 이름이 영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오즈의 마법사’를 본다. 꾸벅꾸벅 졸며 정신을 못 차리는 나와 달리 할머니는 영화를 처음 본 사람처럼 시종일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허리케인이 불고, 집이 날아가고, 불규칙한 곡조의 관현악곡이 흘러나오는 동안 내 눈꺼풀은 천천히 감겨온다.

어깨에 살이 닿는 감촉 때문에 나는 잠에서 깬다. 할머니가 꼭 지르고 있던 팔짱을 풀고, 내 어깨에 조심스럽게 팔을 두르고 있다. 그 순간, 스크린 속 세피아 톤의 밋밋한 화면도 서서히 컬러로 전환된다. 연꽃이 떠 있는 호수와 장미 넝쿨이 만발한 정원이 색을 되찾고, 색채가 없던 도로시와 토토에게도 색이 입혀진다. 할머니의 냄새와 촉감을 느끼며 나는 오즈 씨, 나지막이 속삭여 본다.

동생과 엄마의 죽음 이후 의욕도 꿈도 잃었던 나는 할머니의 부추김으로 가을부터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한다. 정신없이 데생 연습을 하고, 크로키를 숙련하는 동안 할머니 몸에 꽃을 새기는 작업은 유보된다.

계약 만료까지 두어 달을 남겨 놓고, 할머니와 나는 마지막 작업을 위해 거실에 자리를 잡는다.

“누구 주려고 뭘 사본 게 하도 오래전이라…….”

선물이라며 할머니는 표지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단단한 재질의 책을 건넨다. 일반 서적과 달리 종이에 검은 코팅이 되어 있는 스크래치북이다.

“이거 책 맞아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데.”

검게 코팅된 종이를 빠르게 넘겨보는 내게 할머니는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는 건 네 몫”이라 답한다. 영문 모를 말에 의아해하며 니들을 교체하고, 머신을 정비한다. 오른쪽 빗장뼈 아래 있는 도안들만 조금 덧칠하면 작업이 마무리될 듯해 속도를 내 작업을 재개한다.

“오늘은 이만 하자”는 할머니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완성된 타투를 보고 흡족해하는 할머니의 얼굴도 보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학원을 다니며 익힌 것들을 시험해보고 싶은 욕심이 더 컸다. 힘겨워하는 그녀를 향해 나는 곧 끝날 거라는 말만 반복한다.

다른 환자들은 길어야 오 분 지속하는 발작을 할머니는 이십 분에 걸쳐 이어간다. 의사는 할머니의 심낭에 물이 가득 차 있다고 진단한다. 교체 주기가 한참 지난 박동기를 떼어내지도 않고 그대로 착용했던 게 그 이유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는 의사에게 나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두 달 동안 문안을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우스 쉐어링에 대한 공문을 전하기 위해 구청 직원이 한 차례 들렀을 뿐이다. 입원해 있는 동안 할머니는 약물 주입과 심폐소생을 이어가며 겨우 고비를 넘긴다. 계약 만료는 점점 다가오고, 할머니의 혈육이 아닌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다.

할머니는 먹는 음식마다 게워내길 반복하고, 점점 말라간다. 죽음에 대한 말은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아 나는 할머니 앞에선 늘 말을 돌린다.

“할머니가 준 책 말이에요. 거기 뭐가 숨겨져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할머니는 책을 가져와보라고 한 뒤, 손톱으로 코팅지를 천천히 긁어낸다.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온다. 검은 코팅지를 긁어낼 때마다 ‘오즈의 마법사’ 캐릭터에 색이 입혀진다.

“이제 네가 해봐.”

할머니는 내게 책을 내민다. 색채 없던 도로시도, 허수아비도, 겁쟁이 사자도 전부 제 색을 되찾을 때까지 우리는 검은 코팅지를 긁는다.

할머니의 장례는 병원 지하에 있는 추모관에서 치러진다. 직계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나는 상주가 되지 못한다. 대신 키가 크고 어깨가 구부정한 할머니의 조카가 상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는다. 그는 내 이름을 ‘하라’가 아닌 ‘하나’로 잘못 부르는 사람이고, 상중에도 할머니의 재산상속 문제만 집요하게 따져 묻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할머니의 장례를 책임진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도, 짙은 눈썹이나 날카로운 눈매가 할머니와 묘하게 닮은 그를 보면 내가 아니라 그가 할머니의 가족이라는 사실이 절감된다.

발인은 조용히 진행된다. 우는 사람도, 기도를 하거나 작별 인사를 하는 사람도 없다. 화장장 맨 끝에 서서 나는 할머니의 관이 가마로 들어가는 광경을 지켜본다.

“또다시 끝이구나.”

고요히 타오르는 가마 앞에서 나는 중얼댄다. 누군가의 죽음을 접할 때마다 밀려오던 허무와 절망이 다시금 발화된다. 장지로 향하는 행렬을 지켜보다 나는 머뭇머뭇 돌아선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다.

할머니의 죽음 이후, 갈 곳이 없어진 나는 연립을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무력하게 살아간다. 오늘이 며칠인지도, 지금이 몇 시인지도 가물가물한 나날들이 이어진다. 할머니의 조카가 연립에 찾아온 날에도 마찬가지다.

돈에 관한 이야기나 언제쯤 집을 비울 거냐는 독촉을 할 것만 같았던 그는 의외로 자신이 아는 할머니에 대해 담담히 술회한다.

“왜 가족 중에 그런 사람 있잖아요. 다들 쉬쉬하고, 묵인하는 사람. 있어도 없는 존재.”

가족들에게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고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내가 아는 할머니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다 나는 오직 한 단어만을 건져 올린다. 내가 정말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

“강한 사람.”

할머니의 조카는 내게 줄 것이 있다고 말한다. ‘유골을 다 쓸어 담고 보니 이런 게 남아 있었다’며 그는 인공심장 박동기를 건넨다. 고장 난 박동기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심장에 귀를 댄 채 나는 할머니의 박동 소리를 떠올려본다.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걷는 할머니. 웃으면 왼뺨에 보조개가 잡히는 할머니. 가슴에 푸른 꽃을 품은 할머니. 나의 오즈.

그렇게 나는 혼자가 되는 법을 익힌다.

할머니의 집에서 나온 뒤, 나는 새로운 곳으로 이사한다. 좁고 창도 하나뿐이지만, 산책로와 마주해 있어 조용하고 볕이 잘 드는 집이다. 남향으로 난 창 아래 앉아 나는 타투를 한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타투 머신을 소독하고, 새 니들을 끼운다. 생각해놓은 도안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니들을 움직인다. 상처 없는 깨끗한 살에 처음으로 새기는 타투다.

가는 실선 하나가 새겨진다. 니들이 지나간 자리를 나는 손등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본다. 반듯하지도, 깔끔하지도 않은 실선. 선이 어떤 문양으로 이어질지 아직 알 수 없다.

● 당선소감

글 쓰며 겪는 이입과 교감 오래 이어가고파

‘오즈’는 근 일 년간 조금씩 쓰고, 고친 소설이다. 소설을 쓰는 동안 네 계절이 지났고, 몇 번 울었다. 숨죽여 울고 나면 다행스럽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주인공 오즈와 하라에게 조금씩 다가가고 있구나, 그들도 내게 마음을 열고 있구나, 생각하며 안도했다.

그 마음을 알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부족함이 많은 제자에게 기꺼이 자신의 한 편을 내어주신 윤성희 선생님, 송승환 선생님, 김태용 선생님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글이 무언지, 용기와 긍지를 가지고 쓰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던 창작 시간이 내겐 정말 귀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오랜 벗들에게 고맙다. 그들 없는 내 세계는 더없이 작고 빈약했을 것이다. 삶은 끊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것이라 일러 준 사람들. 그들을 통해 사랑을 배웠고, 여전히 배우고 있다.

새해가 되면 품이 넓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매번 갖게 된다. 누군가를 함부로 이해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다정한 어른. 올해는 그런 어른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날마다 슬펐지만. 다가오는 새해엔 다를 거라 믿는다. 쓰며 겪는 이입과 교감이 소중하고 좋다. 이 아프고 생경한 감각을 오래간 이어가고 싶다. 사랑하며, 사랑받으며.

△1994년 충남 예산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 심사평

삶의 상처와 죄의식 설득력 있게 그려내

구효서 씨(왼쪽)와 은희경 씨.
구효서 씨(왼쪽)와 은희경 씨.
소설은 불특정한 독자에게 읽히는 것을 전제로 쓰인다. 모르는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본심에 올라온 7편의 작품 모두 이야기를 만드는 재능이 엿보였다. 그러나 구체적 실감이 없고 개연성이 떨어져 공감하기 어려운 작품이 많았다. 상상력은 이야기 소재나 자료가 아니라 ‘문제의식’에서 나온다.

세탁소 주인이 베트남 출신 아내와 함께 손님이 맡긴 옷을 입고 역할극을 하는 ‘나의 선녀, 그레이스 켈리!’에는 극적 요소가 있다. 또 군대에서 죽은 후배의 행적을 추적해 가는 ‘인사이드 제이’의 기자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예민하고 진중해 보인다. 그러나 쓰는 사람의 에고(Ego)가 지나치게 강하면 소설 속 캐릭터가 혼선을 일으킨다.

‘장례식의 멤버’는 효율적인 단문과 뛰어난 이야기 솜씨, 유머감각과 재치 있는 내레이션이 경쾌함을 준다. 그러나 속도감이 빠르다 보니 편견이 여과 없이 노출되고, 트렌디한 소재를 총망라하다 보니 디테일이 허술하다. 잘 쓴 글이지만 이 모든 연쇄적 이야기들이 과연 어떤 사유에 가 닿는지 다소 공허하다.

당선작은 ‘오즈’이다. 홀몸노인과 빚에 몰려 그 집에 살게 된 젊은 여성을 통해 가해와 피해로 얽혀 있는 삶의 상처와 죄의식, 관계의 회복 등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정형화된 인물을 탈피해서, ‘문신을 새기고 압화(꽃과 잎을 눌러 말린 것)를 만들고 영화를 보는’ 피해자 할머니라는 개성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 데도 성공했다. 소박하고 감상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지나친 욕심 없이 이야기를 적당한 규모로 꾸리고 담담하게 전개한 데에서 엿보이는 균형 잡힌 시각이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다. 당선을 축하한다.

구효서·은희경 소설가
#2019 신춘문예#신춘문예 당선작#동아일보 신춘문예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