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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남쪽 혈육 그리다 눈감은 국군포로… 아버지께 이 사진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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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남쪽 혈육 그리다 눈감은 국군포로… 아버지께 이 사진을 바칩니다

조동주 기자 입력 2018-12-12 03:00수정 2018-12-1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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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恨 대신 풀어준 50대 탈북여성의 눈물
국군포로의 딸 한기복 씨(왼쪽)가 53년 만에 극적으로 만난 혈육들과 축하 케이크를 나누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한 씨의 큰고모, 작은아버지 내외, 둘째 셋째 넷째 고모. 한기복 씨 제공
1989년 9월 북한 함경북도 새별군의 한 주택. 당시 24세 예비 신부였던 한기복 씨(53)는 약혼식을 마치고 돌아와 아버지를 한없이 원망했다. 국군포로 출신인 아버지는 딸의 약혼식에 못 갔다. 조선노동당 간부 집안인 예비 시가가 국군포로 출신 사돈의 약혼식 참석을 막은 탓이다. 한 씨는 “아버지 때문에 내가 괄시당한다”며 설움을 쏟아냈다. 그날 밤, 아버지는 향년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 땅을 밟고 가족들을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죽는구나….”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 ‘국군포로의 딸’이란 주홍글씨

6·25전쟁 당시 17세였던 한 씨 아버지는 경기 양주에서 국군에 투신했다가 북한군에 포로로 잡혔다. 이후 북한 동북 끝자락인 새별군 탄광으로 끌려가 40년 가까이 강제노역을 하며 한 맺힌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북한에서 태어난 딸이 상처받을까 봐 신분을 숨겨왔다.

한 씨는 중학교 3학년 때에야 진실을 알았다. 학교 성적이 좋고 반장을 도맡았지만 끝내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한 씨가 억울해하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한에서 온 국군포로이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그 후 아버지가 손으로 쓴 자서전 성격의 글을 읽고 자신의 뿌리가 남한이라는 걸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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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씨 고향인 새별군에는 국군포로가 모여 살며 탄광 등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 늘 감시를 받는 국군포로는 2명 이상 모일 수 없었고 생일에 친구조차 집에 못 불렀다. 한 씨는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남조선 출신 국군포로 딸’이란 주홍글씨가 새겨져 동네사람들과 시가에서 박대당했다. ‘고난의 행군’ 여파로 먹고살기도 점점 힘들어졌다.

한 씨는 2004년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다. 중국에 13년 머무는 동안 남한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옅어졌고 남한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혈육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갔다. 그는 지난해 10월 제3국을 거쳐 한국 땅을 밟았다.

○ 53년 만에 만난 남한의 혈육

한 씨는 올 2월 하나원에서 나오며 양주에 터전을 잡았다. 혈육을 찾으려고 알아보니 아버지 고향은 현재 행정구역상 의정부시 용현동이었다. 한 씨는 용현동 관할 주민센터를 찾아가 아버지 이름과 생년월일을 댔지만 아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한 씨의 신변 보호를 맡은 방혜경 양주경찰서 경사(42)는 3월 한 씨 사연을 듣고 국방부에 도움을 청했다. 국방부와 경찰청은 한 씨 아버지의 인적사항과 군번 등을 토대로 가족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추려 일일이 확인했다. 두 달 뒤 한 씨 아버지의 여동생이자 한 씨의 큰고모를 찾아냈다. 큰고모는 한 씨 집에서 차로 불과 10분 거리에 살고 있었다.

5월 한 씨는 큰고모와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큰고모는 죽은 줄 알았던 오빠의 딸을 붙들고 오열했다. 미국에 살던 한 씨 작은아버지는 한달음에 한국으로 왔다. 한 씨 아버지에게는 남동생 1명과 여동생 4명이 있었다. 한 씨는 이들에게 평생 남한의 가족을 그리워했던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국방부는 유전자(DNA)를 비교해 이들이 모두 혈육인 걸 확인하고 한 씨에게 국군포로 가족지원금을 지급했다.

한 씨는 고령의 혈육들을 돌보기 위해 곧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딸 예정이다. 한 씨는 1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약혼식 날 철없이 한 모진 말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이 컸다”며 “아버지 동생들을 잘 모셔서 마음의 빚을 꼭 갚겠다”고 말했다.

조동주 기자 djc@donga.com
#국군포로#50대 탈북여성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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