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상운]적폐청산과 어느 공무원의 순직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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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운 정치부 기자
김상운 정치부 기자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명필을 꿈꾸다’ 특별전을 둘러봤다. 중국 산둥박물관에서 17세기 중국 청나라 명필의 서예작품을 빌려와 조선시대 작품과 비교 감상할 수 있도록 한 전시다.

전시장 끝에는 고 김재원 전 한글박물관장을 추모하는 ‘결어(結語) 패널’이 걸려 있었다. 김 전 관장은 지난해 12월 이번 전시를 준비하러 중국 출장을 갔다가 급성 호흡정지로 숨졌다. 패널에는 누군가가 접착테이프로 붙여놓은 꽃 한 송이가 매달려 있었다.

지난해 사드 갈등 이후 중국 박물관과의 전시 교류는 거의 끊긴 상황이다. 하지만 이번 특별전에는 우리나라의 국보에 해당하는 중국 1급 문화재 등 작품 30점이 전시됐다. 국립한글박물관보다 훨씬 덩치가 큰 국립중앙박물관조차 이달 개최한 ‘대(大)고려전’에 중국 송나라 유물 대여를 추진했지만 중국 측으로부터 거부당했다.

이런 악조건에서 한글박물관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데에는 김 전 관장의 공이 컸다. 한글박물관 직원들에 따르면 김 전 관장은 중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출장 서류를 검토하는 틈틈이 논어(論語) 베껴 쓰기를 연습했다고 한다. 중국 고전 인용을 즐기는 현지 관계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중국 국가문물국(우리나라의 문화재청에 해당) 부국장, 산둥박물관장과의 만찬에서 김 전 관장은 논어 한 구절을 한자로 쓰고 중국어로 암송해 좌중의 분위기를 띄웠다고 한다. 한글박물관 관계자는 “김 전 관장이 순직한 직후 중국 측이 성심으로 사후 절차를 도왔다. 1급 유물이 대여전시 목록에 포함된 것은 김 전 관장의 노력에 대한 보답 성격이 있다”고 말했다.

김 전 관장은 귀국 직후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할 예정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엘리트 관료 출신인 그는 국정농단의 핵심 인물인 김종 전 문체부 차관 밑에서 체육정책실장으로 일했다는 이유로 본부 실장(1급)에서 산하 기관인 한글박물관장(2급)으로 강등을 당했다.

문체부 관계자들은 “문제가 된 일은 김 전 차관 측 인사들이 주도했고, 김 전 관장은 특별히 관여한 바가 없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본인으로서는 억울할 법도 하지만 김 전 관장은 묵묵히 새로운 업무에 최선을 다했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를 패스한 정통 관료였지만, 한글박물관에 부임한 후에는 박물관이 소장한 국문학 논문과 전문서 60여 권을 석 달 만에 독파했다. 한글박물관장으로서 전문성을 갖추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국정농단 사건이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다시는 반복돼선 안 될 적폐가 맞다. 그러나 결정 권한이 없는 실무자까지 전방위로 조사해 징계나 인사 불이익을 주는 일이 옳은지는 고민해 볼 문제다. 끝까지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던 김 전 관장의 명복을 빈다.
 
김상운 정치부 기자 sukim@donga.com
#김재원#한글박물관#적폐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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